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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 水源地 두고 내성이 3개… "유별난 산성"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35>
중부일보 데스크승인 2010.10.18   남도일보승인 2012.08.30 00:00    


산성내부 동성안의 모습


청룡산산성은 철령현(鐵嶺縣·철령시 관할) 최진보향(催振堡鄕·이가보향<李家堡鄕>으로 통합됨) 장루자마을(張樓子村)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위치의 범하(汎河)강 좌안(左岸: 즉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구려 옛 성이다. 산성이 자리 잡은 산 이름이 청룡산(靑龍山)이므로 청룡산산성이라 부르며, 장루자마을이 바로 산성 옆에 있으므로 장루자산성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지방 역사학자들은 청룡산산성의 동쪽과 북쪽은 범하강 기슭의 평원과 중요한 길목이며, 서쪽은 요하(遼河)강 충적지인데 요동지역의 모든 고구려산성 가운데 요하강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산성이라고 한다.
 
철령시 변두리에서 철령~무순 간 신작로를 따라 약 10km 나아가면 길옆에 장루자촌이라는 마을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지난번 우리가 최진보산성을 답사할 때 이곳에도 고구려 옛 성 청룡산산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시간 관계로 그냥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찾아와 답사하게 되었다. 관련되는 자료를 먼저 찾아봐서 그런지 청룡산산성은 장루자마을 근처 큰길 남쪽으로 지척에서 보였다.

장루자마을에서 청룡산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아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마을입구에 사는 우(于)씨라는 주민이 차를 타고 산성으로 들어가려면 우리가 오던 길로 되돌아서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뜻을 이야기하고 여기에서 산성의 사진을 한 컷 찍겠다고 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제 집 담장으로 해서 지붕 위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이웃집 주인을 찾아 우리를 안내해 산성에 같이 올라가 보라고 부탁을 한다. 장수삼(張樹森·56)이라고 하는 이웃집 사내는 흔쾌히 우리를 데리고 산성 답사에 나섰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서 "장루자"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이곳에 장씨라는 총병(總兵)이 층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저수지 근처의 우물 용안(龍眼)

장수삼씨는 이 지방에서는 청룡산산성을 "고려성"이라고 부르고, 동북지역의 "청룡산" 하면 이 산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장씨의 안내로 장루자마을에서 오던 길로 되짚어 약 1.5 km 가니 큰길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작은 갈림길이 하나 있었다. 갈림길 입구 가로수에 "연주성황묘(延州城隍廟)"라고 합판에 붉은 글씨로 대충 쓴 초라한 푯말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청룡산산성으로 가려면 이 길로 들어서야 했다. 이 길을 따라 좀 들어가니 길 왼편 자그마한 건축물 근처에 옥수수 밭을 거쳐 산성으로 들어가는 수레길이 나있었다. 이 흙길은 산물이 흘러내리고, 한 옆에 진흙더미가 쌓여있는 개울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차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차를 길가에 주차해 놓고 보행을 택했다. 군데군데 흙탕물이 고여 있는 진흙길을 따라 옥수수 밭을 헤쳐 나아가니 키를 넘는 수풀 밭이 나타나며 그 너머로 야트막한 야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산성이 있는 청룡산이다. 산성 입구(북문)가 가까워지자 장수삼씨가 성문으로 들어가는 수레길 왼쪽(동쪽)의 키 높이 수풀을 헤치며 그 아래에 있는 커다란 웅덩이를 보여주었다. 
 
지름이 300m나 되어 보이는 이 웅덩이는 역시 옥수수 밭이었는데 그 중간에 물이 고여 있고 주변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었다. 이곳이 산성의 권호(圈湖)라고 장씨는 소개했다. 바로 현지 산성조사자료에서 언급된 청룡산산성 북문(정문) 바깥의 저수지였다. 이때 장씨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우리를 이끌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니 옥수수 밭 한가운데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이라기보다는 시멘트와 돌로 잘 둘러쌓아놓은 얕은 샘물이었다. 
 
장씨 소개에 의하면 용안(龍眼)이라고도 부르는 이 자그마한 샘물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아직까지 사시장철 마르는 법을 모르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했다. 물맛도 일품이란다. 이 용안과 그 옆의 저수지는 1300여년 전 고구려산성의 수원(水源)지로서 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산성 북문과 함께 중점으로 수비하였다고 전한다. 수원지가 산성 밖에 있는 것은 요동지역 다른 고구려산성 중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저수지 서벽 쪽의 언덕길을 통해 산성으로 들어가는 북문 터는 오른쪽으로 S형을 이루며 좁고도 깊숙이 들어갔는데, 발굴 조사자료에 나오는 옹성문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현지 산성조사자료에는 이렇게 청룡산산성을 소개한 구절이 있다. "남북으로 산성을 가로지르는 산마루가 성을 대체적으로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놓고 있다. 그중 서쪽 부분은 남북 방향으로 난 좁은 골짜기가 서쪽 성벽과 함께 뻗어나갔다. 골짜기 지세는 상대적으로 평평한 분지로서 "성 안의 성"을 이루고 있다. 동쪽 부분은 동서 방향으로 말안장과 비슷하게 생긴 등성이가 골짜기를 다시 남·북 두 부분으로 나누어놓고 있다…." 현지를 답사하니 과연 그러했다.
 

장루자마을 입구


북문으로 성 안에 들어서자 그리 높지 않은 등성이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발아래 문터에서 남쪽으로 쭉 뻗어나가 성 안을 동·서 양쪽의 골짜기로 갈라놓았다. 이 두 골짜기의 입구도 문터에서 갈라져 있었다. 우리들이 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노라니 동·서 양쪽 골짜기의 전경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동쪽 골짜기는 동서가 상대적으로 좁고 남북이 긴 시야가 트인 평야 모양의 비탈 밭이다. 현지인은 산성자(山城子)라고 하는데 그 바깥쪽(동쪽) 등성이가 바로 청룡산이다. 
 
청룡산 능선을 따라 산성의 동벽이 남북으로 나있다. 이 골짜기가 바로 산성의 동쪽 내성이다. 현지에서는 동성(東城)이라고도 부른다. 분간하기는 힘드나 이 골짜기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그리 높지 않은 등성이 하나가 동서로 가로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등성이 위에도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동성을 두 개의 내성, 즉 남성과 북성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내성 문은 등성이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데 여기서 남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산성 남문이 마주 있다. 남문 역시 옹성 구조를 하고 있다.
 
서쪽 골짜기도 기다란데 너비는 동쪽 골짜기보다 훨씬 좁다. 골짜기 모양새가 긴 조롱박을 닮았다고 하여 현지에서는 호로곡(葫蘆谷)이라고 부른다. 호로곡이 바로 산성의 내성 서성(西城)이다. 호로곡은 사방이 산등성이에 둘러싸여 있고 북문 터 안쪽에 유일한 입구마저 좁고 길어 옛날 고구려 때 일단 적들이 이리로 쳐들어왔을 경우, 많지 않은 군사로도 입구만 막으면 골짜기 안의 적들을 전멸시킬 수 있는 이른바 "죽음의 골짜기"라 불렸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옛날에 고구려 사람들이 소나무가 우거지고 우묵한 이 골짜기에서 말을 먹였다고 해서 현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곳을 마권자(馬圈子·말우리)라고도 부른다.
 
지금 청룡산산성의 이 두 골짜기 안에는 온통 키 넘는 옥수수 밭으로 되어 있어 옛 성의 내성 배치, 특히 동성 내부의 남성과 북성을 얼핏 보아서 분간하기는 힘들지만 이곳의 지형과 지모(地貌)를 꼼꼼히 살펴본다면 옛 성 원래의 윤곽이 의연히 분명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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