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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양지역 고구려성들의 축조시기를 통하여 본 안학궁성의 축조시기


지금까지 평양지역에서 알려진 고구려 성곽들로서는 평양성(장안성), 대성산성, 안학궁성,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 고방산성 등이다. 여기서 평양성(장안성)은 586년의 수도성이고 대성산성은 427년의 수도성이라는데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으므로,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 고방산성의 축조시기를 논하여 안학궁성의 축조시기를 밝히려고 한다.


첫째로, 청암동토성은 247년에 쌓은 평양성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247년에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면서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이 살던 곳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주158] 247년에 옮겼다는 이 평양성의 위치에 대하여 선행연구자들이 논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ㄱ) 평천구역 일대로 보는 설 [주159]

ㄴ)· 6세기 고구려 평양성의 북성으로 보는 설 [주160]

ㄷ) 6세기 고구려 평양성의 북성과 내성으로 보는 설 [주161]

ㄹ) 6세기 고구려 평양성의 내성으로 보는 설 [주162]

ㅁ) 대성산성설 [주163]

ㅂ) 청암리성과 북성을 결합시켜 보는 설 [주164]

ㅅ) 청암동토성설 [주165]


지난날 일제사가들과 일부 역사가들은 247년 당시 평양일대가 낙랑군의 중심지였다고 본데로부터 247년의 평양은 집안, 환인, 강계 등지로 보려 하였고, 일시적으로 평양지방에 왔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와 이후 시기 많은 조선의 역사가들은 247년의 평양성이 오늘의 평양에 있었다고 보았다.


위에서 논한 것을 보면 247년의 평양성 위치를 평양지역에서도 서로 달리 보았다. 다시 말하여 평양성(장안성)설, 대성산성설, 청암동토성설로 크게 갈라볼 수 있다. 여기서 평양성(장안성)은 586년의 수도성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대성산성은 너무 크고 지형이 험하며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없이 협소하다. 특히 대성산성은 고구려가 짧은 기간내에는 쌓기 어려운 성이다. 그러므로 247년의 평양성은 청암동토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그 근거로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권3, 보장봉로, 보덕이암)에는 “도사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토지신을 제압하였다. 옛 평양성의 형태는 신월성(초생달, 반달모양의 성)이다. 도사들이 주문을 외워 남하의 용으로 하여금 보축하여 만월성(둥근모양의 성)을만들고 이에 따라 이름을 ‘용언궁’이라고 하였다. …… 혹은 신령스러운 돌(민간에서는 도제암이라고도 하고 조천석이라고도 한다)을 깨뜨리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옛 평양성은 반달모양으로 생긴 신월성이며 이것을 보축하여 만월성으로 만들고 ‘용언성’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암동토성의 생김새는 북쪽이 낮은 산릉선으로 반달모양처럼 휘어있고 남쪽은 대동강과 면하여 굴곡을 이루면서 약간 휘어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청암동토성 대동강쪽 성벽을 보축하여 ‘용언성’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청류벽 부근 조천석을 깨뜨려 성을 쌓았다고 하면 그것은 청암동토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평양지』와 『평양대지』에서도 ‘용언성’이 청암리에 있었고 그 남단(구흥부동)에 고구려의 큰 건축지가 있는데 그것이 ‘용언궁’이라고 하였다. 근거는 다음의 청암동토성 발굴자료이다.


우선 청암동토성을 발굴한데 의하면 이 성은 고조선시기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주166] 고구려 시기에 세 번에 걸쳐 축조되었다. [주167] 성을 쌓은 다음 수 십 년 지나서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청암동토성의 첫 번째 성벽을 쌓은 시기는 세 번째 성벽을 쌓은 시기보다 퍽 오래 전의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성벽에서 나온 붉은색기와가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이라면 첫 번째 성벽의 축조시기를 3세기 중엽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으로 청암동토성의 서부지역에서 고구려 시기의 건물터와 건물벽화가 발견된 것이다. 이 건물터는 이미 파괴가 심하여 크기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지만 동서 약 50m, 남북 약 20m 정도의 큰 건물이었다고 보여진다. 건물터에서는 건물토방선과 원형기초, 네모기초가 발견되었다. 또한 고구려 시기 붉은색 기와조각들과 건물벽화 조각들이 나왔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건물벽화인데 주로 장식무늬를 그렸고, 금분으로 그린 벽화조각들도 있는 것이다. 이 건물벽화는 집이 불에 타면서 벽체가 구워져 오늘까지 그 일부 조각들이 땅 속에 남아 있었는데, 벽화의 주제와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고구려벽화 무덤들에서 많이 보이는 세잎꽃무늬, 여덟잎꽃무늬, 고리무늬 등 장식벽화들이다. [주168]


청암동토성의 서부지역에서 발굴된 고구려 건물터는 그 규모와 금분으로 그린 건물벽화로 보아 왕조급 건물터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건물터를 498년에 쌓은 금강사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으나 금강사터와 약 400m 서쪽으로 떨어져 있으므로 서로 별개의 건축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24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 지역에 이미 있던 고조선시기의 수도성이었던 청암동토성 벽위에 중축하여 성을 쌓았으며 금분으로 벽화까지 그린 화려한 왕궁도 건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청암동토성과 고방산성을 343년의 황성(동황성)으로 볼 수 있다. 343년의 동황성과 관련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왕이 평양 동황성에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 있다.” [주169]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주170] 고 하였다. 『삼국사기』기록에서 평양 동황성이 서경 목멱산에 있다고 한 것은 편찬자의 견해이며 그 자신도 사실 여부를 잘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평양을 서경이라고 부른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때의 목멱산은 평양부 동쪽 4리에 있는 산이며 거기에 황성의 옛터가 있는데 일명 경성이라고 하였고 전해오기를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하였다. [주171] 


『대동여지도』에도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구역 의암동에 목멱산을 그리고 거기에 옛 성터가 있다는 표식을 하였다. 문헌기록들에서의 평양부 동쪽 4리되는 곳은 오늘의 대동강구역 문흥동 일대인데 여기에는 고구려성 자리도, 건물터도 없다. 그리하여 일부 책들에서는 의암산(대동강구역 의암동)에 있었던 것으로 써 놓았다. 의암산을 목멱산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당시 평양성에서 10리나 떨어진 곳이고 황성이 있을 만한 지리적 조건도 되지 못한다. 343년의 동황성 위치를 청호동토성과 고방산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선 343년에 왕이 동황성으로 옮겨갈 당시 평양성은 청암동토성이기 때문이다. 동황성이 평양성 동쪽에 있는 황성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논의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논하지 않는다.


당시 평양성의 위치가 청암동토성이라고 볼 때 그 동쪽에는 현재 청호동토성과 고방산성 밖에 없으므로 이 성들을 343년의 동황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동황성이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세기 중엽 평양을 중요 거점으로 하는 고구려의 남방진출은 부수도인 평양의 지위를 한층 높일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청암동토성 안의 협소한 왕궁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의 높은 지위에 맞는 위엄있는 왕궁성과 튼튼한 방어성인 산성으로 이루어지는 황성을 자연지리적 조건이 유리한 청호동 일대에 쌓았다고 보여진다.


청호동토성은 현재 임원동, 고산동, 청호동 일대를 포괄하는 평지대의 동쪽 고방산성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성은 북쪽이 약간 높으며 둘레가 약 1.2km되는 네모난 성이었다. 성벽은 이미 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는데, 북쪽 둔덕진 부분이 성벽이 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성안의 중심부분에서는 고구려 시기 원형 기초자리가 여러 개 알려졌고 여기에서는 붉은색 노끈무늬 암키와와 붉은색 수키와 막새 등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청호동토성 안에 고구려 시기 왕궁과 같은 큰 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방산성은 청호동토성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있다. 고방산성은 둘레가 약 3km 정도되는 그리 크지 않은 성이지만 성 방어에 매우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성의 남쪽과 동남쪽으로는 대동강이 감돌아 흐르면서 절벽을 이루었고 북쪽과 서쪽은 성밖으로 급경사이다. 성안은 작은 2개의 골짜기가 서남쪽으로 나있다. 그러므로 성은 동·남·북쪽이 산릉선으로 막혀있고 서남쪽만이 평지와 연결된 고구려 시기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이다. 성벽은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허물어져 대성산성과 같이 약간의 돌무지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다(고방산성과 청호동토성은 이미 전에 많이 파괴되어 있었으므로 그 어느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성안에서는 돌절구, 홍예석(궁륭식 성문의 윗천장돌) 하나가 발견되었고 고구려 시기의 기와편들을 찾지 못하였다. 고방산성의 서남쪽 평지부분에 남문이 있었을 것인데 여기서는 청호동토성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므로 청호동토성과 고방산성은 상호 연관된 성이며 이 두 성은 다같이 343년에 평지성인 왕궁성과 방어성인 산성으로 구성된 동황성으로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일대 고구려성들의 연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청암동토성을 247년의 평양성으로, 청호동토성과 고방산성을 343년의 동황성으로 본다면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은 427년의 평양성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이 고구려 시기 하나의 수도성 체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고구려는 586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이전까지 왕궁성과 수도 방위성을 분리하여 쌓았다. 환인의 하고성자와 오녀산성, 집안의 통구성과 산성자산성, 평양의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오녀산성, 산성자산성, 대성산성은 모두 방어력이 매우 높은 산성들이고 하고성자, 국내성, 안학궁성은 모두 네모진 평지성들이다.


고구려 시기 왕궁성과 수도 방위성과의 관계에서 볼 때 안학궁성은 수도 방위성인 대성산성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있다. 환인 도읍시기 오녀산성과 하고성자는 10km, 집안 도읍시기 통구성과 산성자산성은 2.5km, 평양 도읍시기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은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왕궁성과 수도 방위성을 점차 접근시키는 방향에서 그 위치를 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전과정에 결국 6세기 중말엽에는 왕궁성과 수도 방위성이 하나로 결합된 평산성식 도성 형식인 평양성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안학궁성이 586년 평양성(장안성) 이전 시기에 대성산성과 함께 축조된 427년 천도 당시의 왕궁성이었다는 것을 뚜렷이 시사해준다. 427년 평양성의 수도 방위성을 대성산성으로, 왕궁성을 청암동토성으로 보는 견해도 일부 있으나, 청암동토성을 당시의 왕궁성을 보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그것은 한마디로 청암동토성 안의 자연지세로 보아 강대한 고구려의 위용을 보여주는 웅장한 왕궁을 건설할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것이다.


청암동토성은 전반적으로 북쪽이 산릉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으로 경사지면서 대동강과 접한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고 중심부분은 북쪽릉선에서 남쪽으로 뻗은 몇 개의 낮은 산릉선들로 이루어졌다. 서쪽 평지부분은 협소하고 동쪽 평지부분이 약간 넓은데 남북은 짧고 동서가 약간 넓다. 동쪽 평지부분에서는 역사시대의 그 어떤 유적, 유물도 나온 것이 없으며 협소한 서쪽 평지대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들과 집자리 기초가 일부 알려졌을 뿐이다. 이처럼 청암동토성에는 당시 고구려의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자리도 없고 또 웅장한 왕궁건축의 면모를 볼 수 있는 흔적도 없다. 이것은 청암동토성을 427년의 왕궁성으로 보는 견해가 부당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막강한 국력을 가진 동아시아의 강국의 지위에 맞게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대성산 남쪽에 웅장화려한 안학궁을 건설하고 그 북쪽에 방어력이 높은 대성산성을 쌓아 나라의 위용을 높이 떨쳤다.


 


주158『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7, 동천왕21년(247) 봄 2월.

주159 1965, 『고고민속』3호, 26쪽 ; 『평양략지』, 성지조.

주160 1966, 『고고민속』2호, 14쪽.

주161『평양지』, 37쪽.

주162『평양대지』, 명승고적 ; 『평양속지』, 루대조.

주163 1982, 『고구려력사연구』(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2쪽.

주164 1990, 『고구려사』1, 153~154쪽.

주165 2000, 『조선고고연구』1호, 15쪽 ; 2000년, 『조선의 성곽』, 231~232쪽.

주166 1988, 『조선고고연구』2호, 13~15쪽.

주167 2000, 『조선고고연구』1호, 12~15쪽.

주168 2001,『 조선고고연구』2호, 6~9쪽.

주16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8, 고국원왕 13년(343) 가을 7월.

주170『 삼국사기』권37, 잡지6, 지리.

주171『 신증동국여지승람』권51, 평양부,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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