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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31] 이순신과 세종

일요서울 입력 2016-01-29 09:55 승인 2016.01.29 09:55 호수 1135 48면 댓글 0


- 우리 역사의 가장 큰 두 거인 인연

- 1593년 2월 17일 세종 제삿날 이순신은…


<여의도 공원 세종 동상>


“예나 지금이나 괴로운 병역”


높은 사람들의 인사청문회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병역문제다. 당사자는 물론 자식들의 병역이 논란이 되었다. 그때마다 이상한 것이 있다. 그들은 신체검사 때마다 이상한 질병, 듣도 보도 못한 질병을 많이 앓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면제율도 보통사람들과는 급이 다르게 높다. 세월이 약인지 그 시기가 지나고 높은 자리에 임명될 때는 멀쩡한 모습이다. 얼굴에는 윤기가, 몸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병역 문제는 중요했고, 언제나 논란이 많았다. 다음의 이순신의 일기는 조선시대의 병역제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 1592년 2월 16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 6순을 쏘았다. 군 복무를 시작할 군사와 복무가 끝난 군사를 점검하고 검열했다.


복무를 시작할 군사는 원문에서는 신번(新番), 복무가 끝난 군사는 구번(舊番)으로 표현된다. 《난중일기》에서는 구번을 하번(下番)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양인 이상의 신분으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 중 양반은 가장 중요한 병역 의무자였다. 노비와 현직 관료만이 의무 복무를 하지 않았다.


군 복무자들은 서울로 상경해 8교대로 2개월씩 의무 복무를 하는 번상정병(番上正兵)이나, 혹은 출신 지역의 군대에 소속되어 4교대로 1개월씩 복무하는 유방정병(留防正兵)이 되어야 했다. 양반이나 부유한 양인의 경우는 입대자의 입대기간 중의 생활을 지원하고 입대를 면제받는 보인(保人)이 되기도 했다. 당시 입대자들은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입대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갑옷, 무기, 식량까지 준비해야 했다.


당시 양인 군 입대자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이순신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에 부임해 올린 <이아산시진폐상소(陳弊上疏)>(1578년)에는 그 실상이 적나라하다. 온갖 세금으로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군 복무 의무 때문에 처자식이 먹을 식량까지 갖고 입대했고, 교대근무가 끝나도 생업과 무관하게 관청과 양반들의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다.


지나친 세금과 부역으로 도망치면 친척과 이웃사람들이 그 부담을 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한 마을이 통째로 비는 일도 생겨날 정도였다.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보다 못한 이지함은 “그 끝이 어찌될지 모르겠다”고 통탄했다. 양반들은 오늘날의 병역기피자 혹은 이상한 병역면제자들처럼 병역 의무를 저버렸고, 나라를 지키는 군대는 폐허가 되었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군인의 길을 선택했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예측된 전란을 대비했다.  


이순신의 마음 속 위인, 세종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의 국경일과 같은 날이 있다. 왕이나 왕비의 제삿날이 대표적이다. 1592년 1월 1일부터 남아있는 이순신의 일기 중, 1592년 1월 2일에 처음 나라 제삿날이 등장한다. 이순신은 “나라 제삿날이었기에 좌기(坐起)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날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 제삿날이었다. 관료들은 그런 날에는 소속 관청에 출근하지 않았고, 술과 고기를 먹거나 유흥을 즐길 수 없었다.


‘좌기(坐起)’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생소한 용어라, 대부분의 《난중일기》 번역본에서는 “공무(사무)를 보다” 등으로 번역해 왔다. 그러나 단순히 업무를 보거나, 사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관청에서 관료들이 업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이다. 일상적 용어였기에, 남평 조씨의 한글 일기인 《병자일기》, 이덕형의 명나라 사신 행차 기록인 《(한글 필사본)죽천행록》에도 ‘좌기(좌긔)’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번역 《난중일기》인 설의식의 《난중일기초》만이 ‘좌기’를 좌기로 번역했다.


나라 제삿날에 관료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기생을 물리쳤다(유희춘, 1571년 9월 2일).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날 때, 그 죄목의 하나가 바로 나라 제삿날에 고기를 먹고 유흥을 했다는 것이다(중종1년 9월 2일). 그 만큼 나라 제삿날은 중요한 날이다.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칭 혹은 타칭 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예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 1592년 2월 17일. 맑았다. 나라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이날 일기에 기록된 ‘나라 제삿날’은 누구의 제삿날일까.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임금이나 왕비 등의 제삿날에 그 임금이나 왕비의 이름을 명시한 것은 1596년 7월 1일, “인종(仁宗)” 사례밖에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표제로 쓴 《재조번방지초》에 들어있는 별도의 일기에도 한 차례(1595년 7월 1일, 인종) 나온다. 그 외에는 없다.


2월 17일 일기속의 나라 제삿날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세종의 제삿날이다. 이순신이 세종을 존경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있다. 1593년 2월 17일 일기,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내내 동풍이 불었다. 새벽에 재계(齋)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재계를 한 뒤 이순신은 하루 종일 바쁘게 찾아오는 사람을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다. 그의 일과는 다음날인 새벽 3시(四更)쯤 되어서야 끝날 정도였다.


“새벽에 재계를 했다”는 그 부분이 이순신의 세종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재계는 제사를 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씻고, 정신을 집중해 돌아가신 분을 추념하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재계 기록도 많다. 유희춘은 1568년 4월 7일 일기에서 “문정왕후의 나라 제삿날이기에 재계(齋)를 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남평 조씨도 1638년 9월 29일 일기에서 남편이 “내의원에 좌기했다가 그 후에 재계에 들어가셨다(入淸齋)”고 했다.


《난중일기》에 나라 제삿날이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제삿날 이순신이 재계를 했다고 명시한 유일한 사례는 단 한 번이다. 1593년 2월 17일, 세종의 제삿날이다. 이순신은 그 날 새벽, 위대한 시대를 연 성군(聖君) 세종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 것이 아닐까. 마음속에서라도 그의 인격을 배우고 지혜를 얻고자 그를 불러내 대화하지 않았을까.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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