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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첫 왕성 오녀산성 수호..수도방어체제계 구축 '일익'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53>
오녀산성의 수호성 소성자산성 ①
데스크승인 2011.02.21  
 
 

눈으로 뒤덮인 소성자산성

오녀산성 지킨 고구려 첫 왕성…수도방어체계 구축
‘키’ 모양 산성…2006년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신왕을 위해 축조 

1982년, 단동시 문화고적관리 부문에서 경내의 문화재를 조사할 때 관전(寬甸)만족자치현에 있는 고구려의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을 새로 발견하고 역사유적으로 공식 등록하였다. 이 산성은 2004년에 현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된 후, 2005년 10월에는 시급, 2006년에는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연이어 승격되었다.

성정자산성(城頂子山城)이라고도 부르는 소성자산성은 관전현 우모오진(牛毛塢鎭) 소성자촌(小城子村) 장가보(張家堡) 산 위에 위치해 있는데, 단동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 청산구(靑山溝)풍경구와 5km 거리다. 관전에서 청산구에 이르는 도로가 산성 남쪽 기슭 소아하(小雅河) 강변에 나있고, 산성 동쪽으로는 바로 청산구진의 호당구(虎塘溝)풍경구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구름 위에 솟아있는 고구려 초기산성

자료에 의하면 소성자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1천515m고 성안 면적이 8만4천㎡다. 지세는 북쪽이 약간 높고 남쪽으로 경사지면서 낮아 흡사 키를 방불케 하는 형국인데, 북쪽 가장 높은 곳은 해발 626m고 가장 낮은 곳은 해발 525m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는 날이면 이 산성이 자리한 높은 산정에 구름 안개가 피어오르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중에 떠있는 몽환 같은 신기루를 연상케 한다. 북동쪽으로 오녀산성과 약 38km 거리를 두고 있는 이 산성은 혼강(渾江) 남쪽에서 소아하에 이르는 통로와 고구려 복지(腹地)에서 양평(요동)성으로 가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어 오녀산성의 중요한 군사 부성(副城)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왕성인 오녀산성 주변에 위성 성이 적지 않게 설치되어 있다. 예를 들면 북쪽에는 다물성(흑구산성)과 전수호산성이 있고, 동쪽에는 패왕조(覇王朝)산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미창구(米倉溝)산성, 서남쪽에는 와방구(瓦房溝)산성과 고려성산성, 서쪽에는 마안산(馬鞍山)산성과 고검지(高儉地)산성이 있다. 옛날에 이런 위성 성들은 소성자산성과 함께 오녀산성을 수호하는 고구려의 수도방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6년 말 관계부문에서 조사할 때 이 산성에서는 두께가 1.2~3.5m 되는 성벽을 발견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2m가량 된다.

2007년에도 필자는 소성자산성을 답사한 바 있다. 첫눈에 본 소성자산성의 외부 모습은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과 닮은꼴이었다. 작은 오녀산성이라 해도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에서는 이 산성을 오녀산성의 ‘자매성’이라고도 한다.

필자가 산성 턱밑에 이르자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관전현 “소성자산성 관광개발공사 문화재보호영도소조(領導小組, 즉 지도팀)”이란 문패가 걸린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사 책임자 범옥호(範玉虎)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강경생(姜慶生)이라는 청년을 시켜 우리와 함께 산성을 돌아보게 했다.

강씨와 함께 산성 남쪽으로 해서 산을 올랐다. 산기슭에는 화강석으로 가공한 문화재보호표지석이 세워져있고, 그 정면에는 ‘시급문화재보호단위 소성자유적지 단동시 인민정부 2005년 10월 20일 공표, 관전만족자치현 인민정부 세움’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산성의 보호범위가 표시되어 있다.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되기 전의 표지석이었다.

일부러 단동시에서 승용차를 몰고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단동시의 강여행사 탕지균(湯志鈞) 총경리에 따르면 이곳 관리사무소가 세워진 것은 2006년 이곳이 성급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되면서라고 했다. 이곳을 관광지로 본격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씨 청년은 이 산성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듯, 올라가면서 고구려왕 주몽이 비류국왕 송양(松讓)과 싸워 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이 산성이 오녀산성과 가까워 날이 좋을 때는 여기서 오녀산성을 바라볼 수 있으며, 오녀산성과의 연락은 낭연(狼煙, 말린 승냥이 배설물을 불에 태우면 연기가 한 줄기로 곧추 올라간다고 함)을 피우는 것으로 했다는 등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둘러본 이곳 산성은 여느 고구려산성과 마찬가지로 역시 자연 지세를 이용해 성벽을 둘러쌓았는데 성벽 바깥쪽은 낭떠러지거나 가파른 경사면이고, 성안은 펑퍼짐한 키형의 분지다. 산성에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로는 남문터, 서문터, 장대터, 11곳의 초소터와 6곳의 묘지터, 700여m의 성벽과 옹성, 8개의 치(馬面), 동·서·남 3개 구역의 건물터, 그리고 수문, 우물, 저수지 등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모두 38개나 된다. 그중 건물터만 13곳이나 되는데 터마다 2~12채의 집이 있었던 것이어서 집터가 모두 36개 된다.

성안의 현도궁과 옛 무신왕부

자료에 따르면 소성자산성은 오녀산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고구려 초기 산성이다. 이 산성은 당 총장(總章) 원년(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안동도호부 적리주(積利州) 관할에 들어갔고, 요(遼)나라 때는 개주(開州) 개원현(開遠縣)에 귀속되었으며, 금(金)나라 때는 파속부(婆速府)에, 원(元)나라 때는 파사부(婆娑府) 순검사(巡檢司)에, 명(明)나라 때에는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에 속했다. 후금(后金)시기 황태극이 요동에다 유조변(柳條邊, 버들 책)을 수축하면서 소성자산성을 유조변 바깥의 봉금지에 두어 200여 년간 무관할지역으로 방치되었다. 청나라 동치(同治) 13년(서기 1874년) 청정부가 동변지대에 대한 봉금령을 풀면서 소성자산성 부근 지역은 비로소 다시 개발되고 인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청나라 광서(光緖) 26년(서기 1900년) 도교 전진용문파(全眞龍門派) 21대 제자 장지성(張志成)이 소성자산성 안에 도교사찰 현도궁(玄都宮)을 짓고 반고진인(盤古眞人),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원성모(太元聖母), 관무대제(關武大帝) 등 신위를 봉안했다. 그 당시 현도궁은 정전 3칸, 문간방 3칸, 편전 3칸을 각각 지었는데 한때는 분향객들이 줄지어 찾아와 나름대로 흥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을 지을 때 이 산성의 성벽과 건물들에서 쐐기돌을 마구 뜯어내 사용했으므로 옛 성에 대한 파괴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민국 25년(서기 1936년), 현도궁은 큰 화재로 정전과 문간방 및 경서, 불상 등이 모두 타버렸다. 후에 나중정(羅中正)이란 사람이 사찰을 중수하고 머슴을 두어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1년에 받아들이는 조곡만 7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1949년 이후 현도궁에는 여전히 도인이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1956년에 이르러 현도궁은 소성자산성과 함께 그 당시 인민공사(人民公社, 현재 향<鄕>에 해당)에 넘어갔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들에 의해 이곳의 사찰은 파괴되고 도인은 환속했다.

현도궁 유적지는 산성 내 중간쯤 평탄한 곳에 있다. 집터로 보아 사찰의 길이는 45m고, 너비는 18m로 면적이 450㎡가량 된다. 정전과 산문전, 앞 대청과 서쪽 편전은 모두 쐐기돌로 쌓아올렸으며 남아있는 집터의 높이가 1m 넘는다. 그 당시의 흥성했던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듯 궁터에는 기둥 주춧돌이며 석축대들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었다.

현도궁 부근 멀지 않은 곳에는 ‘무신왕부(武神王府)’라고 쓰인 푯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무신왕부’는 또한 ‘태자부’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제2대왕 유리왕의 셋째아들 무신왕을 위해 축조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축규모가 비교적 큰 이 왕부의 남아있는 건물벽터가 아직까지 똑똑하게 보인다.

어머니가 비류국왕 송양의 딸이며 유리왕의 셋째아들인 무신왕(서기 4~44년)의 이름은 무휼(無恤, 삼국사기), 미류(味留, 삼국유사)로서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라고도 칭했다. 서기 14년(유리왕 33년)에 태자로 책봉된 후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서기 18년에 고구려 제3대왕에 등극했다. 그는 서기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켰고 개미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으며, 서기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신왕은 지혜롭고 총명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까지 겸비했으므로 유리왕은 재위 33년 때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 후에 태자무신왕은 한동안 군사를 거느리고 소성자산성을 지켰다고 한다. 이런 역사기록으로 보아 소성자산성은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이며 오녀산성의 자매성으로 고구려 건국 초기의 산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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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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