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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9] 장군의 평상복

일요서울 입력 2016-06-13 09:38 승인 2016.06.13 09:38 호수 1154 49면


- 여인의 손 없이 바느질하는 삼도수군통

- 담비가죽 고위직 족제비 하위직 ‘털모자’


<이순신 초상화, 조선일보 1928년5월3일>


오늘날은 옷감 재료가 아주 다양하다. 때로는 재료가 무엇인지 모를 때도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재료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까. 대부분 목면(木綿)이나 삼베(麻布) 혹은 갈포(葛布, 칡넝쿨)이다. 목면은 고려 때인 1364년, 문익점이 원에서 씨앗을 가져와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처음 심어 재배한 것이 시작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재배지가 북상해 함경도에서도 재배했다. 목면은 목화(木花) 혹은 무명이라고도 부른다.


갑옷 혹은 관복을 입고 있을 때 외에 이순신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까. 일기 속에 나오는 옷감 재료라고 볼 수 있는 사례로는 목면, 삼베, 생마가 있다. 1596년 6월 2일 일기에서는 “이날, 가죽 바지(皮裙, 피군)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번역에 따라 바지를 뜻하는 초서 원문 “군(裙)”을 치마 혹은 옷이라고 하기도 한다.


바지로 볼 수 있는 다른 사례로는 《악학궤범》, 오희문의 1593년 9월 21일과 1595년 3월 3일의 일기, 이탁영의 1592년 6월 18일에 나오는 포군(布裙) 등이 있다. 정황상 치마로 볼 수 있는 사례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마미군(馬尾裙) 혹은 준군(駿裙)이 있다. 이규태는 《재미있는 우리의 옷 이야기》에서 치마는 “군(裙) 또는 상(裳)이라 하는데 우리 옛 선비들은 상(裳)자를 풀어, 집(堂)과 옷(衣) 속에 감싸여 있는 입(口)이라는 음탕하고 외설적인 발상으로, 이를 쓰기를 퍽이나 기피했다”는 ‘상(裳)’이란 한자와 관련된 이야기도 한다.


이순신이 만들었다는 ‘가죽 바지(皮裙)’의 사례로는 유희춘의 1575년 12월 13일 일기가 있다. 유희춘은 임질 치료를 위해 의원의 권유에 따라 강아지 가죽 바지(兒狗皮裙)를 만들어 입었다.다른 한편으로 초서 원문의 ‘군(裙)’은 襪(말, 버선)·袴(고, 바지)(소, 바지)(보, 보자기)(보, 보자기)의 오독일 가능성도 있다. 보자기의 사례로는 유희춘의 1568년 10월 9일에 나오는 가죽보자기, 오희문의 <임진일록>에 언급된 옷보따리(衣褓)가 있다. 바지를 뜻하는 고(袴)의 사례로는 김종의 1592년 1월 29일 일기가 있다.


군(裙)을 상(裳)과 같은 뜻으로 치마라고 본다면, 《무예도보통지》의 기창복도(騎槍服圖)에 나오는 갑상(甲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임선빈 등이 쓴 《조선 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에 따르면, 갑상은 갑옷의 아랫바지로 치마 형태이라고 한다. 이로 보면 이순신이 만들었다는 ‘가죽 바지(皮裙, 피군)’는 갑옷과 관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가 여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수선하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털모자와 털옷을 벗다


▲ 1592년 3월 10일. 맑았으나,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일기 속 3월 10일은 양력 4월 21일이다.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된 ‘이순신 초상화’는 크게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전래 과정이 불분명하고, 류성룡이 말한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는 선비 같다”와 같은 통념의 이순신과 너무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복 혹은 갑옷 입은 이순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초상화 속의 모자와 옷은 너무 이질적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에는 그 모자를 몽골 모자와 비슷하다며 초상화 자체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 모자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썼던 방한용 털모자, 이엄(耳掩)이다. 우리말로는 남바위라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옛날에는 어깨 덮개(披肩, 피견)로 불렀고, 성종은 이엄을 2천 개를 만들게 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경국대전》에서는 직급에 따른 소재도 규정하고 있다. 정1·2품은 담비가죽(貂皮, 초피), 그 이하는 족제비 가죽(鼠皮, 서피)으로 만들어야 했다. 민속학자 최상수는 이엄 테두리에 “너비 5센티미터 정도의 모피(毛皮)를 둘러 붙였다”고 했는데, 동아대 소장 이순신 초상화 속의 이엄도 모피를 붙인 듯한 모습이다.


이엄의 재료가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나는 족제비 가죽이나 담비 가죽이었기에 왕이 하사할 만큼 귀했다. 유희춘의 일기에도 왕이 하사한 이엄에 감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또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에게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이엄을 선물 받은 장면도 나온다. 양반이나 일반 서민들이나 겨울을 나는 필수품이었다. 그래서 오희문은 1595년 1월 27일 일기에서 아들 오윤성이 이엄이 없이 추위 속에서 먼 길을 떠나왔기에 “얼굴이 얼어붙은 배(梨)”와 같다며 걱정하는 모습이 나올 정도다. 유희춘의 경우에는 노비들을 위해 이엄을 만들 개가죽(狗皮)을 나눠주는 모습도 기록하고 있다.


《난중일기》 1594년 10월 12일에도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원수(元帥, 권율)에게 족제비 가죽(鼠皮, 서피)으로 만든 이엄을 받은 기록이 나온다. 《선조실록》 1594년 9월 21일에 따르면, 권율이 준 이엄은 실제로는 선조의 명령으로 보내진 것이다. 선조는 “바다와 육지의 여러 장수들이 여러 해 동안 왜적을 방어하고 대치하느라 그 고생이 대단하다”며 이엄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이순신(李舜臣), 원균, 이억기, 충청수사 이순신(李純信), 도원수 권율, 순변사 이빈, 경상 병사 고언백·김응서, 방어사 권응수, 경상 좌수사 이수일, 전라 병사 이시언, 한산도에 머물러 이순신을 돕던 정걸, 조방장 김태허·홍계남·곽재우·정희현, 경주 부윤 박의장 등에 보내게 했다. 그 때 김덕령에게는 특별히 여우 가죽(狐皮, 호피)과 입이엄(笠耳掩)을 함께 보내게 했다.


한편 12일 일기 이전인 장문포 전투 중에 쓴 일기인 《난중일기》 1594년 10월 4일에는 담비 가죽(貂皮, 초피)이 나온다. 선조가 이엄을 갖고 가게 한 선전관 이계명이 이순신에게 준 것이다. 이 담비 가죽은 12일 권율에게 받은 족제비 가죽 이엄과 달리 방한용 털가죽 옷으로 보인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특별히 준 듯하다.


이순신의 1592년 3월 10일 일기 혹은 다른 일기에도 초상화와 같은 털옷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겨우내 입었던 털옷 혹은 방한용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유희춘은 1568년 3월 9일(양력 4월 8일)에 비로소 털옷(毛衣)을 벗었다가 감기에 걸렸다. 김종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4월 13일(양력 5월 13일)에 “날이 따뜻해 상의(裳衣)을 벗었다”고 했다. 이순신도 3월 10일 무렵에는 봄옷으로 갈아입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생활 기록으로 보면, 동아대 박물관의 이순신 초상화는 족제비 가죽 이엄과 담비 가죽 옷을 이순신의 모습이다. 이순신 막하 승병이 이순신이 전사한 후 추모해서 그렸다는 구전과 관련해 보면 나름 일리가 있다. 이순신이 겨울철에 평상시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방한모와 방한용 털가죽을 입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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