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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24] 거북선의 등장

일요서울 입력 2015-12-14 09:50 승인 2015.12.14 09:50 호수 1128 54면


- 장군이 직접 만든 거북선 최소 3척 다수설

- 임진왜란초 2척이 1595년 5척까지 늘어나


<통제영 거북선(통영사)>


드디어 거북선이 등장했다. 이순신이 1591년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뒤 야심차게 추진했던 그 거북선이 일기에 처음 등장했다.


▲ 1592년 2월 8일. 맑았으나, 또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이날 거북선(龜船, 귀선)의 돛으로 쓸 베 29필을 받았다. 낮 12시쯤에 활을 쏘았다.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겨루었으나,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왔다. 갖은 말로, “방답첨사(이순신)가 온 정성을 다해 방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동헌 마당에 돌기둥으로 만든 화대(火臺)를 세웠다.


전쟁 발발 하루 전에 완성된 거북선


거북선의 원문은 ‘龜船(귀선, 구선)’이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대부분 ‘거북선’으로 부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3일 이전 거북선이 명시된 일기는 2월 8일을 포함해 3차례다. 거북선으로 추정할 수 있는 4월 11일 일기까지 합친다면 모두 4차례다.   


▲ 1592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포(砲)를 쏘는 것을 시험했다.

▲ 1592년 4월 11일. 이제야 (거북선에 쓸) 베로 만든 돛이 만들어졌다.

▲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거의 완성된 거북선에서 포를 쏘는 시험을 하고, 돛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4월 12일의 일기는 전쟁 발발 하루 전이고, 사실상 거북선의 완성을 언급한 일기다. 그 후의 일기 중에는 모두 5차례 거북선이 나온다.


▲ 1593년 7월 13일. 순천 소속으로 거북선 격군인 경상도 사람, 사내종 태수가 도망치다 붙잡혔기에 처형했다.

▲ 1594년 2월 4일. 늦게 본영 전선과 거북선이 들어왔다.

▲ 1594년 2월 15일. 거북선 2척과 보성 1척 등을 멍에로 쓸 나무 자르는 곳으로 보냈다.

▲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을 기록한 메모. 거북선을 돌진시켜 천자(天字)·지자(地字) 총통을 연달아 쏘게 했다.

▲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을 기록한 메모. 먼저 거북선을 시켜 곧바로 뚫고 들어가 천자·지자 총통을 연달아 쏘아 그 층루대선(層樓大舡)을 쳐서 깨뜨리게 했다.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은 몇 척일까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은 이렇게 모두 9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거북선의 형태나 크기, 또 몇 척을 건조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거북선은 몇 척이었을까. 정유재란을 포함한 임진왜란 전체 기간 중에는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보고서, 기타 자료 등을 살펴보면, 최소 2척에서 최대 5척 정도였던 듯하다. 다만 1594년 초까지는 2척으로 추정된다. 이순신 자신이 직접 관할했던 전라좌수영의 거북선과 방답첨사가 관할하는 방답 거북선이 그것이다. 또한 이순신의 보고서에 언급된 거북선장(돌격장)을 살펴보아도 2척으로 보인다.


특히 1592년 5월 사천해전과 7월의 한산대첩 때는 이기남과 이언량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1592년 9월의 부산해전, 1593년 2월의 웅포해전, 1594년 3월 당항포 해전에서는 이언량만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보면 이기남과 이언량이 각각 좌수영과 방답의 거북선을 주로 지휘했던 듯하다. 또한 《난중일기》 1594년 2월 15일 일기에서도 “거북선 2척” 언급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2척 이상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3척이라고 보고 있다. 그 근거는 네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기재잡기》를 인용해 한산대첩 때 이순신이 거북선 3척에 군사들을 나눠 싣고 적의 대장선을 공격케 했다는 기록이다. 둘째는 《나주읍지》에 기록된 나대용 장군관련 내용에는 거북선 3척이 언급된다.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의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셋째는 안골포해전에 참전했던 일본군 출신 소토오카 진자에몬(外岡甚左衛門)이 쓴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의 기록이다. “… 9일(조선 날짜로는 7월 10일) 오전 8시쯤부터 적의 큰 배 58척과 작은 배 50척 정도가 공격했다. 큰 배 중 3척은 맹선(盲船, 장님배)이었다.” 맹선이 바로 거북선이다. 넷째는 《난중일기》 1593년 7월 13일 일기 때문이다. 이 날 일기 중의 “順天龜船格軍慶尙人奴太守”의 번역 때문이다.


번역에 따라 달라지는 거북선 숫자


기존의 여러 번역자들은 이날 일기를 이은상의 번역, “순천의 거북선 격군인 경상도 사람의 종 태수”처럼 번역했다. 즉 순천에도 거북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좌수영 거북선, 방답 거북선, 순천 거북선의 3척이 된다. 그러나 《이충무공 진중일기》를 쓴 임기봉은 “순천의 격군으로 거북선에서 일하던 경상도 태생이며, 순천부사(太守)의 종(奴)”으로도 번역하면서, ‘순천 거북선’의 존재를 부정한다. 임기봉은 번역의 잘못으로 생긴 것이라며, “있지도 않았던 임난 순천거북선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해전사에 중대한 오류를 남기고 있다”고 말한다.


임기봉의 주장처럼 번역에 따라 거북선의 숫자가 완전히 달라진다. 다른 이들의 기록을 제외하고 이순신 자신의 기록 즉 《난중일기》와 해전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1593년 7월 13일까지는 최소한 순천 거북선이 있었다고는 확증할 수 없다. 때문에 필자도 7월 13일의 일기를 “순천 소속으로 거북선 격군인 경상도 사람, 사내종 태수”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1594년 봄 이후 부터는 거북선이 추가로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연구가 겸 독도박물관장이었던 고(故) 이종학 선생이 1976년 발굴해 소개한 《사대문궤(事大文軌)》 속의 <사문본국군병(査問本國軍兵)에 대한 회자(回咨, 중국과 왕복한 글)>(1595년 3월)가 그 증거자료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배설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을 지휘하며, 궁포수(弓砲手), 초수(梢水, 배의 키잡이), 수수(水手, 선원) 등 총 6,838명과 전선 60척, 거북선 5척, 탐선 65척 등을 거제현 서쪽 바다에 있는 한산도에서 거느리고 있다.” 이는 즉 1595년 3월에는 거북선이 5척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상으로 보면, 임진왜란 초기에는 2척, 1595년 즈음에는 5척으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거북선은 이순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이순신의 거북선과 같은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은 거북선을 만들 지혜와 자기 혁신이다. 이순신처럼 끊임없이 지혜를 쌓고, 혁신할 때, 각자만의 거북선이 태어날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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