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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해설난중일기 32] 척자점(擲字占)

일요서울 입력 2016-02-04 10:19 승인 2016.02.04 10:19 호수 1136 48면 댓글 0


- 온갖 걱정에 빠진 이순신, 하늘에

- 《주역》 시초 뽑아 점치는 방식과 유사


<소강척자점>


상세히 번역된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현대의 입장에서는 의아해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순신이 점을 쳤다는 기록이다.  《난중일기》에서는 그 점을 ‘척자점(擲字占)’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척자점을 “글자를 짚어 점을 친 것”이라하고 있다.


척자점은 《주역》으로 점을 칠 때 시초를 뽑아 점을 치는 방식과 유사하다. 한문 글자를 골라 그 획수를 계산해 남은 숫자를 이용하거나, 종정도 놀이의 도구로 주사위 역할을 하는 윤목을 굴려 숫자를 얻어내거나, 윷을 던져 나온 ‘도·개·걸·윷·모’를 그 자체 혹은 숫자로 변환시켜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 숫자를 《주역》의 텍스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척자점 텍스트에서 찾아 숫자가 의미하는 점괘를 읽어 길흉을 판단한다.


▲ 1594년 7월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생각하며 척자점(擲字占)을 쳤다. 결과는,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길했다. 다시 던져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였다. 두 괘가 다 길했다. 걱정을 덜었다. 또한 류정승(류성룡)에 대해 점을 쳤다. 결과는,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을 치니, “의심했어도 기쁜 일이 생긴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렸다. … 비가 올지 맑을지 점을 쳤다. 결과는 “뱀이 독을 토하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장차 큰 비 내릴 것이다. 농사가 걱정이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7월 13일, 이순신은 아들 면과 영의정 류성룡에 대한 걱정,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퍼붓는 비 걱정으로 점을 쳤다. 아들 면은 이순신의 막내 아들이다. 같은 해 6월 15일, 이순신은 아내 상주 방씨가 보낸 편지로 추정되는 한글 편지를 받았다. “아들 면이 여름철 더위병으로 심하게 아프다”는 소식이었다.


이순신은 “살을 벤 듯 아프고 가슴만 탔다”고 했다. 6월 17일에도 아들 면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만 태웠다. 7월 10일에는 면의 병이 다시 심해졌고,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7월 11일에는 “면의 병이 어떤지 궁금하다”며 걱정했다. 점을 치기 전날인 7월 12일, 면의 병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지독히 타지만 어찌하랴”며 가슴만 두들겨야 했다. 이순신은 그렇게 거의 한 달 동안 사랑하는 막내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했다.


영의정 류성룡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 이순신이 점을 쳤을까. 6월 15일, 이순신은 류성룡에게 편지를 받고는 “이 분을 뛰어넘어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그만큼 이순신과 류성룡은 서로를 교감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관계이다. 점을 치기 전날인 7월 12일, 순변사처에서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순신은 말했다.


“이는 시기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비방하는 것이다.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이날 어두울 무렵 마음이 지독히 어지러웠다. 홀로 아무도 없는 동헌에 앉아 있었다.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염려로 더욱 괴로웠다. 밤이 깊도록 잠들 수 없었다. 류정승이 만약 일찍 죽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비는 또한 얼마나 내렸기에 비 걱정을 하면서 점을 쳤을까. 한 달 전쯤부터 살펴보면 무더위가 계속되다가 비가 엄청나게 내리기도 했었다. 6월 14일에는 더위와 가뭄이 심했고, 이순신이 진을 치고 있던 한산도도 푹푹 쪘다. 이순신은 가뭄과 무더위로 “농사가 걱정”이라고 했었다.


15일에는 오후에 보슬비가 내렸고, 밤에는 소나기가 내려 농사 걱정을 덜어주었다. 16일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야 갰다. 그 후 17일부터 7월 5일까지는 맑았고, 날씨는 무더웠다. 6월 23일에 소나기가 한 번 내렸을 뿐이다.


7월 6일에는 종일 궂은비가 내리고, 밤 11시부터는 소나기가 퍼부어 이순신이 거처한 방 안까지 비가 새기도 했다. 7일에는 보슬비가 내렸고, 8일과 9일에는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큰 바람이 불었고, 10일에는 저녁에 이슬비, 11일에는 궂은비와 큰 바람이 내내 불었다. 12일에는 날씨가 다시 갰다. 아마도 8일과 9일부터 11일까지는 태풍이 분 듯하다. 그러다 13일에 다시 비가 계속 내리자 이순신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농사를 망칠까 우려로 점을 쳤다.


7월 13일, 이순신을 점을 친 것은 위독한 아들, 영의정 류성룡의 사망 소식, 가득이나 가물었다가 갑자기 내리는 폭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이라는 상황이었다. 걱정이 한가득한 이순신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하늘에라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순신의 점이었다. 하늘에 의지해 부귀영화와 횡재를 꿈꾼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 존경했던 영의정 류성룡, 백성들을 살릴 농사 걱정 때문에 하늘에 호소한 것이 그의 점이다.


이순신의 절절한 호소 때문이었는지 두 점괘는  그의 표현처럼 “길했다.” 비에 대한 점괘는 좋지 않았지만, 이는 조금 더 철저히 대비하면 될 일이었다. 점괘처럼 아들 면은 다시 소생했다. 7월 15일, 이순신은 면의 병의 나아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쁨이 어찌 끝이 있으랴. 기쁨이 어찌 끝이 있으랴”라고 했다. 류성룡의 사망 소식도 헛된 소문으로 판명났고, 이순신은 9월 13일 류성룡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비는 그의 점괘처럼 “뱀이 독을 토하듯” 7월 16일까지 오락가락하며 퍼부었다. 점을 친 다음날인 14일 이순신은 “비가 계속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삼대같은 빗발이 쏟아졌다. 집이 새어 마른 곳이 없었다. 간신히 밤을 보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였다. 아주 묘했다.”고 점괘의 적중에 감탄할 정도였다. 비는 17일에야 그쳤다.


이순신이 비를 걱정했던 시기에 실제로 비가 많이 내렸다. 오희문의 1594년 7월 13일에도 관련 기록이 나온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는데, 밤새 내렸다. 6월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7월 초부터 비가 내려 지금까지도 개지 않는다. 곡식이 물에 잠겨 썩거나 모래에 덮인 곳도 많았다.”


이순신 시대에는 양반 혹은 선비들도 점을 자주쳤다. 그들의 점친 목적을 살펴보면, 이순신과는 차이가 많다. 이순신의 점은 질병에 걸려 생사가 위태로운 아내 혹은 아들 걱정, 멘토 류성룡 걱정, 전투 직전 전투를 걱정하며 친 점들이다. 그 시기 다른 양반들의 점은 대부분 출세나 행운을 기다리며 친 점이었다. 그것이 위대한 불패의 명장 이순신의 점이다.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의 ‘척자점(擲字占)’은 훗날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저술한 《경도잡지》에서는 ‘척사점(擲柶占)’, 즉 ‘윷점’으로 상세히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을 살펴보면, 이순신 시대에는 유득공이 기록한 척사점과 같은 윷점 기록은 없다. 이는 척자점이 훗날 척사점으로 명칭과 도구(윷)가 변화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그 시기에 자주 언급되는 점은 동전을 이용해 주역의 괘를 만들어 점을 치는 척전점(擲錢占)이다. 오희문의 일기 속 척전점이나 택당 이식의 척전점 기록을 살펴보면, 《난중일기》 속의 척자점과 달리 《주역》 혹은 다른 형태의 텍스트를 활용했던 듯하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척자점은 모두 5일 동안의 일기에서, 9개의 주제, 14번 점을 친 기록이 나온다. 이순신처럼 순결한 목적과 간절한 마음일 때만이 하늘은 행운을 열어준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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