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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43] 지진이 민든 人災, 전쟁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입력 2016-04-25 09:42 승인 2016.04.25 09:42 호수 1147 49면


- 전쟁 속 한반도를 뒤흔든 지진


<한산대첩비>


일본에서 지진이 또 일어났다. 불가피한 자연환경 때문이다. 일본 지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축복받은 땅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종호의 《과학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년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있었던 지진을 시작으로 총 1,897회의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일본의 지진을 지진 그 자체로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지진으로 인한 일본 내부의 공포와 불안감을 침략전쟁 등으로 우리에게 표출해왔기 때문이다.


▲ 1594년 6월 3일. 바닷물이 뿌옇게 변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이래 드문 일이었다.


“바닷물이 뿌옇게 변했다”는 무슨 의미일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조실록》과 다른 일기들을 살펴보면 지진의 영향 혹은 적조(赤潮)로 추정된다. 《선조실록》에는 1594년 5월 14일 경상도, 5월 26일 서울, 6월 3일 서울, 충청도·홍주, 경상도 초계·고령, 전라도 전주·김제·고부·여산·익산·금구·만경·함열, 6월 14일 경상도에서 각각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6월 3일은 서울을 비롯한 남부지방 전역에서 땅이 흔들렸다. 갑작스럽게 연이어 발생하는 지진에 대해 사람들은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선조는 왕인 자신의 탓이라며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까지 해야 했다.


이순신이 일기를 쓴 날인 1594년 6월 3일의 오희문 일기에서는 그날 하루에 세 번 큰 지진이 일어났고, 새벽에는 “큰 비가 내렸고 천둥이 치더니 지진이 일어나 집이 세 번 흔들렸고, 소리가 큰 천둥 같았는데, 오늘처럼 큰 지진은 없었다”고 했다. 이 날 지진에 대해 《선조실록》에서는 “소리가 천둥치듯 했고, 땅위의 물건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고, 나중에는 땅이 꺼지는 듯했다”고 경악하고 있다.


《선조실록》과 오희문의 일기, 정경운의 일기 등을 종합해 보면, 5월 14일부터 6월 14일까지 동시다발로 지진이 일어났다. 때문에 이순신의 일기 속 장면은 직접적으로 지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지진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1594년부터 지진 빈도가 높아져 1597년까지 매년 크고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오희문의 1595년 2월 9일과 23일 일기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발생한 지진이 나온다.


▲ 새벽에 지진이 일어났다. 천둥소리 같았고, 창문이 한참동안 흔들리다 그쳤다(오희문, 1595년 2월 23일).


오희문에 따르면, 1595년 8월 29일에도 천둥치듯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선조실록》에는 1595년 9월 2일 서울, 9월 20일 강원도, 12월 3일 황해도 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1596년에는 1월 4일 충청도 연기에서 지진이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1월 23일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정선의 경우에는 지붕 기왓장이 흔들려 무너질 지경이었다. 이어서 2월 13일 경상도 영천·풍기, 2월 14일 충청도 충주, 8월 1일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597년에는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함경도에서 지진이 연속으로 8번이나 일어났다.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이 올린 보고서에는 엄청난 지진 모습과 흰색과 노란색 냇물 색깔을 언급하고 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바닷물이 뿌옇게 변했다”는 것이 지진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해주는 내용이다.


▲ 지난 8월 26일 진시에 삼수에서 지진이 있었으나 잠시 후에 그쳤습니다. 27일 미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곳이 무너졌고, 고을 건너편 시루바위 반쪽이 무너졌습니다. 그 바위 아래 삼수동 냇물 색깔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28일에는 다시 노란색으로 변했고, 인차외보 동쪽 5리쯤에서는 붉은색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습니다. 8월 26일 진시에는 소농보 건너편 북쪽 덕자이천 절벽에서 두 번이나 포 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쳐다보았더니 하늘 높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몇 아름 크기의 바위가 연기를 따라 솟아 나와 흔적도 없이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 27일 유시에 지진이 일어나 그 절벽은 다시 무너졌습니다. 그날 해시와 자시에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10월 2일)


같은 해인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충청도 당진 등에서도 지진이 일어났는데 곳에 따라 하루에 3~4번 혹은 6~7번 연달아 지진이 일어났고, 11월 17일에는 충청도 전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폭풍 같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원인의 하나인 일본 대지진


상대적으로 지진 안전지대라고 하는 우리 한반도에서 계속 지진이 일어났다면, 지진 위험국인 일본은 당시 어떤 상황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빈발하고 있던 시기인 1596년 8월, 일본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대지진이 일어났다. 명나라 사신이 강화협상을 하러 일본으로 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일본 대지진을 보고했다.


▲ 병고(兵庫) 지역은 산이 주저앉아 호수가 되었고, 풍후(豊後) 지역은 집 4∼5천호가 모두 땅에 묻혔고 높은 언덕만 남았습니다. 그 지역은 모두 큰 바다로 변했습니다. 8월부터 9월까지 20여일 동안 연일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근처 집의 벽은 완전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선조실록》 1596년 12월 21일)


이 지진은 1596년 8월 8일 교토(京都) 지역에서 발생해 10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상명대 김문자 교수에 따르면, 당시 전체적으로 수만 명이 죽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던 후시미성(伏見城)도 무너져 성 안에 있던 700여명이 죽었고, 히데요시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지진에 주목한 일부 학자들은 대지진으로 흉흉해진 일본 민심을 분출시키기 위해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기록인 정경운의 1596년 9월 16일과 22일 일기에도 정유재란 발발 가능성을 우려한 모습이 나온다.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었고,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있기에 반드시 침략해 노략질 할 근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난중일기》의 “바닷물이 뿌옇게 변했다”는 적조로도 볼 수 있다. 《선조실록》 1603년 3월 10일과 조익의 1603년 3월 일기에는 강원도와 함경도 바다가 붉은 색, 심지어 핏빛같이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842년 8월 8일의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경상좌병사가 바닷물이 탁하게 변했다고 보고하는 기록도 있기는 하다.


지진이든 적조현상이든,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크다. 특히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597년 8월의 대지진은 정유재란의 원인의 하나임이 확실하다. 역사를 보면, 최근의 일본 지진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 그 불똥이 우리에게 어떻게 튈지 예리하게 주시해야 할 일이다. 또 우리나라의 어설픈 지진대책도 철저히 보완해야 할 때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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