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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21] 숨은 영웅 ‘포작’(鮑作)

일요서울 입력 2015-11-23 14:11 승인 2015.11.23 14:11 호수 1125 54면


- 배 조종, 전투병, 정보원으로도 활약

- 《명량》 묘사 백병전 당시 해전에 거의 없어


<철환, 전쟁기념관 소장>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 이전의 일기에는 전쟁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었던 이순신이 나온다.


▲ 1592년 2월 3일. 맑았다. 새벽에 우후가 각 포(浦)의 잘못을 조사하는 일로 배를 타고 나갔다. 공무를 처리한 뒤, 활을 쏘았다. 탐라(耽羅) 사람이 자녀를 포함해 6구(口)를 이끌고 도망쳐 나와, 금오도에 정박해 있었다. 방답의 순환선(循環船, 경비선)이 그들을 붙잡아 올려 보내왔다. 진술을 받은 뒤, 승평(昇平, 순천)으로 보내 가둬놓게 했다. 공문을 써서 보냈다. 이날 저녁, 화대석(火臺石,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돌이다. 현재 여수 진남관에도 석주화대 2개가 있다) 네 덩어리를 운반해 올려놓았다.


이런저런 업무로 현장을 확인·점검했고, 자신의 고유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다. ‘탐라’는 제주도다. 당시 제주 목사는 양대수(楊大樹, ?~1592)였다. 양대수와 이순신도 인연이 있다. 양대수는 무과 출신으로 1588년, 여진족이 두만강 하류 녹둔도를 침입했을 때 회령 부사 변언수 등과 함께 격퇴했다. 양대수는 그 전투에서 여진족 380여 명을 사살했다고 전한다. 바로 그 전투에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이 참전했고, 이순신은 승전 공로로 백의종군에서 해제되었다.


잊혀진 영웅, 바다 유랑민 포작


 당시 제주도는 토질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웠다. 주민들도 각종 수탈에 시달렸다. 게다가 이 시기인 16세기에는 자연재해도 심했다. 그런 까닭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를 떠나 전라도나 경상도로 많이 이주했다. 이날 일기의 제주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순신은 이들을 세는 단위로 ‘구(口)’를 썼다. 이는 양인의 숫자를 세는 단위인 ‘명(名)’과 다르다. ‘구(口)’라는 단위는 노비를 세는 단위다. 이로 보면 제주도에서 나온 사람들의 신분이 천민인 ‘포작(鮑作, 보자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들처럼 제주를 떠나 바닷가를 유랑하는 사람들을 포작으로 불렀다.


2월 3일 일기처럼, 포작들은 제주를 떠날 때 가족과 함께 제주를 벗어났다. 그러나 제주 주민의 육지 정착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붙잡힌 사람들은 다시 제주로 돌려보내졌다. 이순신이 그들을 순천부로 보낸 이유는 군사와 민간행정이 이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순천부는 민간행정을 주관했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과 소속 관포의 군사행정을 주관했다.


포작들은 정처 없이 바다 위를 떠돌며 조개나 미역을 채취하거나,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왜구가 출몰할 때면 이들 포작은 수군에게 바닷길을 안내하기도 했고, 배를 조종하거나, 전투병, 정보원으로도 활약했다. 이들이 타는 배가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장계에 등장하는 포작선이다.


일본군의 해양 전투 전술을 경험한 포작


이순신의 함대는 전선(戰船)인 판옥선은 물론이고 포작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면, 판옥선 보다 포작선이 많았다. 이순신의 1차 출전인 1592년 5월 4일에서 5월 8일까지 출전한 배를 살펴보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이었다. 포작과 포작선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포작으로 배를 능히 조종할 수 있는 연해 사람들”(1593년 3월 22일 이후의 메모)라고 포작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천민과도 같았던 포작과 함께 승리를 만들었다.


《성종실록》과 《선조실록》등을 살펴봐도 포작은 해양방위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성종실록》, 1485년 4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포작들은 정해진 거처가 없이 바닷가에 장막을 치고 살며, 배에서 생활하는데, 사람들이 재빠르고 사나우며, 그들의 배는 가볍고 아주 빨라 폭풍이나 거친 파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적을 만나도 왜적이 두려워 피해 도망친다. 포작들은 배에 큰 돌 수십 개를 실고 다니며, 왜적을 만나면 돌을 던져 왜선을 파괴했다. 이들 바닷가 고을에서 진상하는 해산물은 모두 이들 포작이 채취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선조실록》, 1600년 1월 4일 기록을 봐도, 전선(戰船)은 포작이 없으면 운행할 수 없다. 그러나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전쟁터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격군으로 동원되는 것을 피하려고 온갖 꾀를 낸다고 하고 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1571년 3월 17일 기록에도 포작들이 바다에서 왜구들을 만나 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왜구들은 포작선에 부딪치고(相搏), 칼을 들고 배에 뛰어올라 공격하는 방식으로 싸웠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전투 방식이 바로 왜구의 전투방식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왜구 혹은 일본군의 전투 방식과 달리 포격전으로 조선 수군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군을 격파했다.


때문에 흔히 알려진 소나무로 만든 조선배가 튼튼해 일본 수군 배를 부딪쳐 격파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구와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일본군의 전략전술을 포작선의 사례 등을 통해 간파하고, 일정거리를 두고 포를 쏘아 격파했기에, 영화 《명량》에서 묘사된 백병전 같은 경우는 사실상 거의 하지 않았다.


여자 포작은 ‘포녀(浦女)’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해녀’가 바로 그런 경우다. 조선 후기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호남 여행기인 《남유록·남행집》, 1722년 11월 16일에 기록된 시, <남당가>에는 포녀(浦女)가 나온다. “포녀가 푸른 저고리 길게 땅에 끌고, 바다 밑으로 잠수하느라 머리카락 노랗게 변했네”는 대목이 그것이다.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포작의 저항


포작들이 이순신의 수군에서 막중한 역할을 했고,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작들이 항상 순종만 한 것은 아니다. 통제를 벗어나려는 포작들에 대한 기록도 《난중일기》에 나온다.


▲ 1594년 5월 30일. 아침에 도적 등과 도망쳐 돌아가자고 꼬인 광양 1호선 군사인 경상도 포작 3명을 처벌했다.

▲ 1594년 8월 26일. 흥양의 포작 막동이란 놈이 장흥의 군사 30명을 몰래 자기 배에 싣고 도망친 죄로 처형해 효시했다.


포작의 도망은 국가에 의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지금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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