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810/1/BBSMSTR_000000010227/view.do


<31> 고구려-唐 첩보전

기사입력 2011.08.10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05


외교사절을 스파이로… `소리없는 전쟁' 불뿜다

진대덕이 당군의 큰 장애물로 본 압록강.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현장법사가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요하 하류의 광활한 소택지 요택.


641년 1월 15일 장안. 당 태종의 4촌 동생인 강화왕 도종이 이끄는 사절이 토번을 향했다. 행렬 속에는 토번의 실력자 녹동찬 일행과 혼인의 당사자인 문성공주가 있었다. 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가는 화려한 행렬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려 있었다.


고구려 태자 고상권의 귀국 행렬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공개적인 스파이 집단이 동행했다. 당의 정보국장인 직방랑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과 부하들이 그들이다. 상권도 장안 체류기간 동안 당과 그 주변 국가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창국이 당에 의해 멸망했고, 토번과 당이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를 따라온 실무진들은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장안에서 상권은 강력한 토번의 등장이 향후 어떠한 변수가 될지 생각했다. 당 태종이 정면충돌을 회피한 군사강국이 아닌가. 하지만 양국의 평화를 보증하는 문성공주가 토번왕에게 시집을 갔다. 장기적으로 보면 토번이 당에 위협이 될 수는 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당과 토번의 혼인동맹과 고창국 멸망은 결코 서로 무관한 사안이 아니었다. 고창국 배후에 존재한 서돌궐 또한 당의 강적이었다. 타림분지에 위치한 고창(투르판)ㆍ이오ㆍ언기 등 오아시스 국가들은 머나먼 당제국보다 인접한 서돌궐 통엽호 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칸과 고창국왕 국문태는 긴밀한 사이었다. 칸의 처는 국문태의 여동생이었다. 둘은 현장법사 이야기를 전하는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626년 국문태는 사막을 구사일생으로 건너온 현장법사를 고창성으로 초청했다. 법사는 한 달 동안 고창에서 불법을 설파했다.


국문태는 법사의 후원자가 됐다. 그는 매제인 칸에게 법사를 소개하면서 비단 500필과 과일 두 수레를 딸려 보냈다. 법사는 소위 ‘칸의 신용장’을 소지하게 되면서 인도로 가는 여정이 순조로웠다. 서역 각국의 환대는 법사가 좋아서가 아니라 서돌궐 칸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현장법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칸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628년 시작된 싸움은 무려 4년을 끌었다. 서역 각국도 내전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들은 두 개의 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자국을 통제하는 파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 태종은 편지를 보내 두 파가 전쟁을 멈추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누구 하나가 서돌궐을 통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632년 두 파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당 태종은 서돌궐의 칸을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뿐 또다시 내전이 시작됐다. 당과 토번의 군사적 대립이 한창이던 638년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태종이 밀던 측의 힘이 약해지고 대립세력이 강대해졌다. 이 세력의 우두머리인 아사나욕곡설(阿史那欲谷設)은 반대파를 절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서역 전체를 통일해 버렸다.


서돌궐의 통일은 그들과 인접한 티베트 고원의 토번과 당이 결혼동맹을 맺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파장은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국가에도 당장 밀려왔다. 고창국왕 국문태는 욕곡설의 하수인이 됐다.


국문태는 욕곡설에 끌려 언기를 공격하고 서역과 당나라의 왕래를 단절시켰다. 욕곡설에게 코가 꿰인 국문태는 당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었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국문태는 사신을 보내 해명을 했지만 당 태종은 전략적 요충지인 고창을 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돌궐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였다. 640년 고창은 그렇게 멸망했다.


고창을 점령한 당 태종은 그곳을 거점으로 해 욕곡설에 적대적인 또 다른 서돌궐 부족과 손을 잡았다.


또한 상권이 귀국하는 길에 고구려 지형지세를 파악하기 위해 진대덕을 따라 붙였다. 상권도 당의 최고 교육기관 국학(國學)에 동생들을 남겨 놓았다. 이후에도 국제정세는 변화할 것이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탐지해야 한다.


방어하는 입장에서의 고구려가 당의 침공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서돌궐과 토번 같은 강국의 움직임에 주목했다면, 침공하려던 당은 고구려의 지형지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원했다. 장안을 출발한 진대덕은 13년 전 영류왕이 당에 제출한 고구려지도(封域圖)를 머리에 넣고 있었다.


고구려에 접근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요하 하류의 광활한 소택지였다. 당의 고구려 침공에 거대한 장애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남북 길이가 약 300리, 동서 너비는 200리의 요택(遼澤)은 아득히 넓은 늪의 평원이었다. 평원에 거미줄 같은 하천망이 밀집해 있고, 갈대와 수초들이 무수히 자라는 진펄과 종횡으로 뻗어나간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려기’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이 뭍으로 들어온 곳과 물갈래가 많다. 서쪽 물가에 긴 버들이 자라니 가히 군대(兵馬)를 숨길 만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물가 땅을 이름해 요택이라 한다. 숨을 만한 잔풀이 있어 온갖 짐승(毛群羽族)이 산다.”


진대덕은 엄청난 수량의 비단을 지참하고 고구려에 들어왔다. 고구려에 입국하자 그는 가는 곳마다 비단을 현지 관리들에게 뿌렸다. 뇌물을 받은 관리들은 그에게 협조적이었다. 원하는 곳은 자유롭게 다 갔고, 현지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그것을 ‘고려기’라는 보고서로 남겼다.


660년경 장초금(張楚金)이 편찬한 ‘한원(翰苑)’에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붙였는데 ‘고려기’를 인용했다. 고구려의 9관등과 남소성(南蘇城)ㆍ평곽성(平郭城:건안성)ㆍ불내성(不耐城:국내성)ㆍ마다산(馬多山:백두산)ㆍ언골산(焉骨山:오골성)ㆍ은산(銀山:안시성 부근의 은광)ㆍ마자수(馬訾水:압록강)ㆍ황천(黃川) 등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641년 8월 귀국한 진대덕은 보고서를 당 태종에게 올렸다. 그것은 645년 당의 고구려 침공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의 설계에 자료가 됐다.


진대덕은 고구려를 다니면서 많은 중국인을 만났다. 고급 정보는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고구려 일반에 관한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됐다. ‘자치통감’은 그들이 진대덕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향) 집은 (중국) 어느 군(郡)에 있었는데 수(隋) 말년에 군대에 나왔다가 고(구)려에 들어와 잡혀 남게 됐습니다. 고려에서는 유녀(遊女)를 처로 삼게 했으며, 고려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거의 반이 될 것입니다.”


612년 고구려에 들어온 수나라 병사 30만 가운데 상당수가 포로로 남았다는 것을 이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622년 당과 고구려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고구려는 1만여 명을 송환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였다.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된 그들은 고구려에서 강제노동으로 근 30년을 보냈고 사오십대 중반이 됐다. 당시로서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었다.


진대덕을 만난 그들은 자신이 중국의 어느 지역 사람인데 나의 혈육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했고, 이산된 가족들의 상황을 물어 보았다. 그들은 이제까지 고향소식을 물어볼 중국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으리라. 진대덕과 그의 사절단 사람들이 그들 모두의 고향소식을 알 리 만무하다. 하지만 타향의 땅에서 죽기 전에 고향 소식을 얼마나 알고 싶었을까.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 진대덕은 “모두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대덕이 고구려에 왔다는 소식이 광범위하게 퍼지자 그들이 몰려왔다. 왕경인 평양이 아닌가 싶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며칠 후 그(진대덕)를 바라보고 통곡하는 수 시절 사람들이 성 밖 들판에 가득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억류된 수말 종군자들의 수효와 현황에 대해 당 태종에게 보고했다. 수의 고구려 침공 실패와 이어진 동란 속에서 청춘을 보낸 당 태종은 동년배인 그들의 망향과 이산을 가슴으로 느꼈으리라. 그들의 존재는 당 태종으로 하여금 고구려 침공을 심리적으로 정당화시키는 파편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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