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61027150403262


낙랑공주가 살았던 그곳 요동·요서·한반도 어디쯤

[고구려사 명장면 5] 

임기환 입력 2016.10.27. 15:04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출처=국립중앙박물관


때는 32년 4월, 낙랑국의 도성. 군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낙랑왕 최리(崔理)에게 고구려군이 바로 성문 앞까지 쳐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아니 자명고각(自鳴鼓角)이 어찌 울리지 않았단 말인가?" 최리는 부랴부랴 무기고로 달려갔다. 북은 찢겨 있고, 뿔피리는 깨져 있었다. 이내 자신의 딸이 저지른 것임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딸을 찾아내 죽이고는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에 항복하였다. 애비로서 어여삐 키운 딸을 죽일 때는 결코 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딸을 충동해서 자명고각을 부수게 한 고구려 왕자 호동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내가 저 녀석을 믿고 사위 삼았다가 딸도 잃고 나라도 잃었구나". 그런데 다른 전승에는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정복하려고 일부러 최리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하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이다. 호동은 대무신왕의 서자인데, 어머니는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로서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갈사왕이 누구냐 하면 대무신왕이 정벌하여 죽인 동부여왕 대소의 막냇동생이다. 대소가 죽고 나라가 망하자 갈사수에 와서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따지고보면 대무신왕은 갈사왕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를 두려워해 손녀딸을 대무신왕에게 시집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인연으로 태어난 왕자 호동이 낙랑국을 멸망시키는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전문학에서는 흔히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히곤 한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낙랑국의 실재를 보여주는 사료로 자주 거론된다. 즉 낙랑군과 구분되는 낙랑국이 지금 평양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이나 요서에 있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이다. 과연 그러할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대에는 낙랑(樂浪)과 관련된 3개 기사가 전한다.

첫째는 32년에 호동 이야기가 나오는 낙랑국 최리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사이다.

둘째는 37년에 고구려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사이다.


셋째는 44년 9월에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 낙랑을 정벌하여 군현(郡縣)으로 삼아 살수(薩水·청천강) 이남이 모두 한(漢)에 속하였다는 기사이다.


위 세 기사는 언뜻 내용상 서로 연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첫째 기사에서 32년에 낙랑국이 항복했고, 5년 뒤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켰다는 게 둘째 기사이며, 후한이 44년에 군대를 보내어 다시 낙랑군을 재설치하였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 기사는 본래 신라 측 전승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37년)조에는 "고구려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내항하여 6부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바로 이 기사에 의거해 고구려본기의 둘째 기사가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셋째 기사는 25년에 시작된 낙랑군 왕조(王調)의 반란에 대해 후한이 군사적 조치를 취한 기사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낙랑군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첫째 기사에서 최리의 낙랑국을 평양 일대의 낙랑군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낙랑국은 어디일까?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호동이 "옥저(沃沮) 일대를 유람하다가 최리와 만났다"고 되어 있다. 즉 최리의 낙랑국은 옥저 지역에 있었던 것이니, 바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옥저 등 영동7현 세력으로 추정함이 타당하다. 그리고 신라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역시 낙랑군 영동7현과 연결지으면 무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위 첫째 기사와 둘째 기사의 낙랑은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


본래 동예·옥저 지역은 임둔군이 폐지된 이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의해 관할되었다가 기원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영동7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었는데, 이때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현이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후국은 최리의 '최(崔)'라는 중국계 성씨 및 '자명고각(自鳴鼓角)'이라는 기물의 존재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한(漢)나라 문물의 세례를 어느 정도 받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들 후국이 독자세력화하면서 '낙랑국'으로 주변에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동설화에서 보이는 낙랑국의 '자명고각(自鳴鼓角)'이라는 기물은 곧 중국 군현과 연관된 우수한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고(鼓)]은 군대가 진격할 때 사용되고, 뿔피리[각(角)]는 후퇴할 때 사용한다. 즉 고각(鼓角)은 군사력의 상징이며, 고각의 파괴는 곧 낙랑군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지나칠까? 호동왕자가 낙랑국을 정복한 기사는 고구려가 낙랑군의 통제력을 깨뜨리고 옥저 지역을 장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로 보아도 충분하다.


아내 낙랑공주를 죽게 하면서까지 낙랑국을 정복한 호동은 그 공훈으로 행복하게 살았을까? 설화는 그 뒤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해 겨울 11월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그 이유는 낙랑공주를 그리워해서였을까? 그랬더라면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회자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동의 자살은 자신이 첫째 왕비로부터 참소를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대무신왕이 호동을 사랑하였는데 낙랑국을 정복하는 큰 공까지 세웠으니, 대무신왕의 원비는 자신의 아들 대신 호동이 태자가 될까 걱정했다. 그래서 원비는 호동이 자신을 희롱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참소를 거듭했고, 아버지 대무신왕이 의심을 하자 끝내 호동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호동의 자살은 당시 고구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이었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버지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정략결혼과 정치 갈등은 두 젊은이의 거듭된 죽음을 낳았고, 그래서 짧았던 이 사랑 이야기는 더욱 큰 비극이 되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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