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427150407807


광개토태왕비 내용 해석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고구려사 명장면 18] 

임기환 입력 2017.04.27. 15:04 


광개토왕비 주운대 탁본 1면


1972년 10월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를 변조했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가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란 책에서 밝힌 변조의 전말은 이렇다. 1880년 가을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사카오(酒勾景信) 중위를 중국에 파견했다. 사카오는 북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밀정 임무를 수행하면서 1883년 4~7월 무렵에 집안 일대에 들어가 광개토왕릉비를 보게 됐다. 비문의 이용 가치가 큰 것을 알게 된 사카오는 일본에 유리하도록 신묘년조 기사 등 25자를 변조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131장을 만들고, 1883년 10월에 귀국해 이를 육군참모본부에 제출했다.


쌍구가묵본


이 탁본을 토대로 육군참모본부는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 5집을 '고구려고비(高句麗古碑)' 특집호로 발간했는데, 여기서 이른바 '신묘년(辛卯年)조'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 사이 육군참모본부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파견해 능비를 조사했으며, 189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카오의 변조를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라 변조했다는 것이다.


이진희의 연구는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현지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문 연구는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그러다가 1981년 중국의 왕건군(王健群)이 현지 조사를 통해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란 책을 발간했다. 그는 현지의 중국인 탁본공이 탁본을 쉽게 하기 위해 비문의 여기저기에 회칠을 하는 과정에서 변조됐을 가능성은 있으나 비문 발견 초기부터 조직적인 비문 변조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고 하여, 이진희에 의해 제기된 일제 육군참모본부 변조설을 부정했다.


탁본에만 근거한 이진희의 주장보다는 현지 조사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왕건군의 연구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변조 여부의 타당성을 떠나서 이진희의 연구는 무엇보다 근대 일본 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양태에 대해 진진한 반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 제기로서 의미를 잃지 않는다고 본다.


이진희에 의해 환기됐듯이 일제 관학은 비문의 신묘년 기사를 일본의 백제, 신라, 가야에 대한 정복으로 해석하고, 이를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과 결합해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征韓論)의 역사적 근거로 활용됐다. 이렇게 광개토왕비문은 처음부터 정치적 의도를 갖고 역사 왜곡과 결합해 그 연구가 출발하게 되면서 이후 비문 연구는 근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구성하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됐다.


광개토태왕비문 중에서 집중적인 논란의 대상은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다. 비문 변조설 역시 이 구절에 집중돼 있다. 왜냐하면 그 문장에는 고구려와 백제·신라 및 왜가 맺고 있는 국제적인 관계가 21자(字)란 아주 짧은 문장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의 한일 관계가 아주 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단락을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가, 보이지 않는 글자를 무슨 자로 볼 것인가, 변조된 글자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변조설이 등장하기 이전에 일단 이 신묘년 문장은 이렇게 판독됐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


일제 시기에 일본 관학자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다.


민족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 말에 이런 일제 관학자의 해석을 비판하는 견해를 제기했으나 공표하지는 못했고, 1955년에야 비로소 발표됐다. 정인보는 신묘년 문장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영락6년 병신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정인보는 당대 한학의 최고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해석은 좀 궁색해 보인다. 짧은 문장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런 정인보의 해석법은 아무래도 민족적인 관점이 깊이 개입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정인보의 고구려 주어설은 그 뒤 북한과 한국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여러 다양한 형태의 해석을 낳았다.


김석형은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패수)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문맥과 뜻이 순조로워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 뒤를 이어 정두희, 이기백 등도 또 다른 해석법을 제시했다. "(고구려가) 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즉, 문장 서두의 왜를 목적어로 보고 또 '以辛卯年來'를 '신묘년 이래'로 해석했는데, 앞뒤 문장의 논리적 연결이란 점에서 문맥이 잘 통하지만, '渡海破'의 주어와 목적어가 도치돼 다소 작위적인 문장이 된다.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이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비문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오랜 속민(屬民)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결코 백제는 고구려의 속민이 된 적이 없었으며, 신라도 광개토왕대에 들어 고구려에 신속하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비문 내용이 전부 사실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상황론에 입각한 위와 같은 해석은 또 다른 선입관을 드러내는 셈이다.


앞의 두 견해는 모두 위 판독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한 해석이다. 그러나 비문이 변조됐다면 새로운 판독이 먼저 시도돼야 한다. 특히 신묘년 글자 중에서도 기왕에 '海'자로 판독됐던 글자는 변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82년에 중국 주운대(周雲台)가 찍은 탁본에서도 다른 글자와 칸이 맞지 않고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 '氵'자가 세로로 그은 선에 겹쳐 있다.


사실 비가 알려진 초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돼 비면의 상태가 나빠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이 유행했을 뿐이다. 1887년께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정교한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뒤 비문에 석회가 발라지고 탁본이 만들어졌다. 석회로 비문이 변조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을 '원석(原石)탁본'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비문 연구의 주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원석탁본에서도 '海'자로 판독된 글자는 불분명하며, 변조됐다는 근거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문을 인정하고, 또 문장 해석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되, 이는 고구려 측에서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됐다. 즉 신묘년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 당대 고구려인의 비문 필법에 따른 허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묘년 기사는 일부 문자의 변조 여부를 의심받고 있으며, 그 문장 해석이나 역사상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런 다양한 주장의 이면에는 오늘날 근대국가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원석탁본이나 비에 대한 현지 연구를 통해 정확한 판독이 진행돼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 비문을 당대 고구려인의 관념에서 접근하려는 시각이 전제돼야 하겠다.


1500년 전 고구려인이 쓴 광개토태왕비문을 근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구성하는 텍스트에서 해방시켜야 비문이 만들어진 그 시대, 고구려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텍스트로서 제자리에 바로 세울 수 있다. 광개토태왕의 시대에 고구려인들이 만들어간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광개토왕비문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본 이유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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