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825174813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9) 고려풍 · 몽골풍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8.25 17:48 수정 : 2009.08.25 17:53 


ㆍ고려의 바람, 몽골에 닿고 몽골의 바람, 고려에 부니

몽골 알타이의 서북단에 자리한 고원 도시 바얀올기에서 선참으로 찾아간 곳은 바얀올기 박물관이다. 지난해 개관 60돌을 맞았다고 한다. 지역 박물관치고는 내용이 꽤 알차다. 3층짜리 건물의 1층은 선사시대부터 남겨 놓은 역사유물과 각종 동식물의 박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이곳 사람들의 처절한 반청(反淸)독립 투쟁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생생한 유품들과 사진으로 꾸며졌다. 3층은 생활관인데 바위 그림과 적석목곽분, 돌사람과 오보, 쟁기와 맷돌, 곰방대와 안장, 먹을거리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것과 유사한 용품들이 눈에 띄어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낫. 얼개미 등 각종 농기구(바얀올기 발물관 소장)


이러한 유사품들은 여기 말고도 홉드 향토박물관이나 울란바토르의 민족사박물관에서도 적잖게 발견된다. 사실 몽골을 여행하다 보면 체형이나 인성에서부터 세세한 생활 습속이나 용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닮은꼴이 많아서 의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물론 연구자들마저도 이러한 유사성에 관해 종종 대서특필한다. 심지어 정치판에서는 이러한 유사성을 앞세워 두 나라 간의 ‘국가연합’ 같은 엉뚱한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성은 무시한 채 유사성만 강조한 나머지 우리 문화의 원형(뿌리)을 몽골에서 찾는다든가, 몽골에 대한 ‘문화적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성을 과장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는 이론(異論)도 일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이 문제에 관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선 적어도 두 가지 맥락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역사적 맥락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 맥락이다. 역사적 맥락은 다시 두 차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고대의 역사적 및 문화적 공통 뿌리(원류)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의 고려-원 시대에 일어났던 이른바 ‘고려풍’과 ‘몽골풍’ 및 그 여파이다. 


두 나라는 혈통적·언어적으로 동군·동족 


몽골인과 한국인이 역사적 및 문화적 공통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같이 인류의 3대 인종군 가운데 몽골로이드, 그것도 친연성이 한 층 더 강한 북방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그래서 황갈색 피부, 검고 곧은 모발, 적은 체모, 중·단두형 머리, 작은 키, 평평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 검은 눈, 미간의 낫 모양 주름(몽골주름), 엉덩이의 몽골반점 등 형질학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군과 더불어 3대 어족(語族) 가운데서 한국어와 몽골어는 다같이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이를테면 두 나라는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동군(同群)·동족(同族)으로서 그 시원은 선사시대의 70만~8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생인류로서 현재를 사는 두 인종의 직접적 조상은 역사시대의 동호(東胡)나 흉노(匈奴)로 헤아려 진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단군 국조로부터 치면 4000여년이 되지만, 몽골족은 1200여년밖에 안 된다. 오늘날의 몽골족은 기원후 8세기쯤 헤이룽강(黑龍江) 상류인 에르군네 강 유역에 살던 몽올실위(蒙兀室韋)란 이름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다. 그러다가 서천해 11~12세기에 몽골의 오논 강 일대까지 진출해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병합한 뒤 칭기즈칸에 의해 1206년 몽골제국이 세워진다. 그 과정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일족으로서 변신하는 과정이며, 우리 한민족과 부단하게 교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녀 징집으로 원나라에 고려식 옷·음식 유행 


몽골 여인들의 외출 용 모자 ‘고고’


두 나라 간의 유사성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반드시 현실적 맥락에서도 짚어봐야 한다. 현실적 맥락이란 이렇게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 유사성이 형성될 수 있었지만 오랜 역사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함으로써 현실적으론 유사성(공통성)과 함께 차이점(개별성)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명(문화) 간에 일어나는 유형(類型, type)과 양식(樣式, style)상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유형은 문명 간의 공통되는 형태이고, 양식은 드러나는 표현 방식이다. 비유하면 숲과 나무와의 관계이다. 유형만 보고 양식을 무시한다든가, 반면에 양식만 보고 유형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을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고려-원 시대에 일어났던 이른바 ‘고려풍’과 ‘몽골풍’이다. 고려는 후반 30년간(1231~1259년) 몽골의 일곱 차례 내침을 막아내고 근 100년간(1259~1351년)의 간섭을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당시 몽골 중심의 천하에서 자주권을 지켜낸 유일한 나라이다. 그리고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를 찾아가 원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막강한 원의 끈질긴 간섭과 강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문화적 접변(接變)으로 인해 이러한 ‘불개토풍’ 약속은 사실상 유명무실되고 말았다. 


카자흐인이 만든 과자에 찍힌 ‘고려풍’ 무늬


원은 고려로부터 인삼을 비롯한 특수약재와 청자. 비단. 담비가죽. 사냥매 등 진귀품을 조공의 이름으로 요구하고 해마다 양곡을 징발해 갔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세자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세뇌교육을 시킬 뿐만 아니라 원 세조의 딸을 비롯해 황실의 공주들을 고려왕의 왕후(모두 7명)로 삼게 하며 왕들까지도 몽골식 이름을 강요했다. 관직 이름에서도 부대를 ‘애마’(愛馬, 아이막), 역체관을 ‘탈탈화손’(脫脫禾孫, 톡토하순), 상관을 ‘나연’(那演, 나잔)이라고 하는 따위의 몽골식 직명이 난무했다. 


양국 간의 인적 교류에서 특기할 것은 고려 여자를 진공하는 이른바 ‘공녀’(貢女)이다. 쿠빌라이는 충렬왕에게 보내는 조서에서 고려와 원은 이제 한집안이 되었으니 서로 통혼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양국 간의 통혼과 공녀를 종용했다. 간섭기 80년 동안 ‘처녀진공사신’이 50여차례나 고려에 와서 해마다 약 150명의 여자들을 징집해 갔다. 그밖에 수시로 뽑아간 여자는 부지기수다. 원에 끌려간 공녀는 대개 황제나 황후, 황족의 궁인이나 시녀가 되었다. 원 말엽에 궁중의 급사나 시녀는 그 태반이 고려 여성으로 채워졌으며, 지방관까지도 고려 여성을 처첩으로 거느렸다. 그러나 모든 공녀가 이러한 비운에 빠진 것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순제의 정비가 된 기황후(奇皇后)처럼 일세를 풍미한 여걸도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 천지에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이라고 일컬었다. 이때부터 어갱(魚羹, 생선국)과 계육(鷄肉, 닭고기), 송자(松子, 잣), 송골병(松骨餠), 인삼주 같은 고려 음식이 원에 유행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몽골의 유제품이나 과자에 찍혀 있는 문양은 이때에 받아드린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 몽골에서 전래된 한국의 족두리


물론 공녀들이 ‘고려풍’을 일으키는 데 한몫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에 유입된 선진 고려문물도 그 선양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 세조는 고작 세금이나 거두고 시구나 읊조리는 한인(중국인)들보다 고려인들이 기술면에서 나을 뿐만 아니라 유학경서에도 능통하다고 찬사를 보내면서 ‘고려국유학제학사’(高麗國留學提學司)를 설치해 고려 유학(儒學)을 전문 연구토록 했다.


고려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당을 열어 두 나라의 석학들이 만나 학문을 교류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원에 고려의 뛰어난 불교경전 사경본이 수출되고 고려의 명의 설경성(薛景成)이 원 세조와 성종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고려 바둑고수들이 초빙된 사실들은 선진 고려 문물의 유입을 말해준다. 


인조 때 몽골 소와 담배 교환… 한우의 조상 


우리는 몽골의 어느 박물관에서나 빠짐없이 우리네 것을 빼닮은 연죽(담뱃대)과 담배통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니 ‘고려풍’을 타고 들어간 ‘조선풍’이다. 조선 땅에 1636~1637년 심한 우질(牛疾, 소 전염병)이 돌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인조는 성익(成釴)을 몽골에 보내 담배와 소를 바꿔오게 한다. 성익은 몽골의 여러 기(旗)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가 추위와 정신 집중에 유효하다는 설득으로 몽골 소와 담배를 교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몽골 소가 오늘날 한우의 조상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중엽부터 몽골에는 담배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라마교의 나라 몽골에서 승려는 흡연이 불허되기 때문에 돌로 만든 작은 통에다가 담뱃가루와 향료를 섞어 코로 빠는 이른바 ‘코담배’라는 독특한 흡연법이 발생한다. 그러자 귀족들과 일반 목민들까지도 따라함으로써 하나의 사회풍조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만날 때 코담배를 교환하는 인사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몽골의 ‘고려풍’과 때를 같이해 일어난 것이 고려의 ‘몽골풍’이다. 이 ‘몽골풍’은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원래 고려인들은 윗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윗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 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칠릭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예모로 남아 있는 여성들의 족두리는 원래 ‘고고’라는 몽골 여성들의 외출 용 모자였던 것이 들어와서는 예모로 변신한다. 신부의 뺨에 연지를 찍는 화장도 ‘몽골풍’이다. 상투 대신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머리를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 내리는 이색적인 몽골식 개체변발(開剃髮)도 한때 유행했다. 


‘마누라’ ‘수라’ 등 다수 낱말 몽골어에 기원 


몽골의 쟁기(민족사박물관 소장)


음식문화에서도 일부 ‘몽골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대 토주의 하나인 소주는 원류를 따져 보면 토착주가 아니라 몽골을 통해 들어온 교류주다. 증류주인 소주는 원래 기원전 3000년쯤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져 전승되어 왔다. 1258년 몽골군이 이라크를 공략할 때 그 양조법을 배워 와서는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 주둔지에서 처음 빚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그것을 따라 배워 빚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아락주)이다. 그리고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육식을 꺼려왔으나 몽골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고기소를 넣은 만두 같은 육류식품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도 즐겨 먹는 설렁탕도 양을 잡아 대강 삶아 먹는 몽골의 ‘슐루’라는 음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도를 통해 조랑말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다. 


그밖에 우리말로 굳어진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다. 왕과 왕비에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가리키는 ‘마누라’(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에서 어미격인 ‘치’는 ‘다루가치’(관직)나 ‘조리치’(청소부), ‘시파치’(매사냥꾼) 같은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어미 ‘치’자를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몽골 간의 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 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질 때 문명 본연의 상보적(相補的)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토풍’이란 인위적인 제어도 불구하고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등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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