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728170726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5) 몽골은 어떻게 갈라졌는가

문명학자 정수일 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7.28 17:07 수정 : 2009.08.19 11:40 


ㆍ강대국 야욕에 둘로 찢어진 ‘800년 제국’


홉드에 있는 만청통치 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1762년 축조) 전경.


어떤 중국 사람들은 자국 지도를 펼쳐놓고는 이런 회심과 걱정을 한다. 원래 중국 지도의 모양새는 온전한 엽상(葉狀, 잎사귀 모양)이었는데, ‘외몽골’이 갈라져 나가면서 등살이 없어진 수탉 모양을 하게 되었고, 이제 티베트가 떨어져 나간다면 통통한 가슴살이 빠져버린 여윈 수탉 꼴이 될 것이며, 여기에 더해 신장마저 잃어버리게 되면 엽상은 아예 일그러져 볼꼴 사납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지도를 확 바꿔놓는 이런 ‘참변’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내세우면서 티베트나 신장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은 혹여 이 때문은 아닌지. 


‘외몽골’이 떨어져 나갔다는 이른바 ‘수탉론’의 진원은 따지고 보면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수탉’형으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은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실로 복잡다단한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여곡절이 많은 분단 과정이다. 그런 상황은 아직껏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서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호도되어 왔다. 그 결과 몽골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몽골 사람들 자체도 분단의 현실에 대해 적어도 겉으론 통감하는 것 같지 않으니, 남이야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몽골의 분단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들 간에 해묵은 공방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런 공방은 조만간 그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지난 시기 몽골의 분단현실에 관해 상당히 궁금해했다. 궁금할수록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듣고 배운 것과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데다가 이 문제에 대한 각방의 시각이 그토록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수시로 바뀌어 왔다. 여기에 더해 이상하리만큼 이 문제에 관한 연구가 미미하고 애매모호하다. 아마도 껄끄러운 문제라서 그런가 보다. 그리하여 이번 현지답사, 특히 중국 만청 통치의 흔적이 묻어있는 서몽골 일원에 대한 현장 답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런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작심했다. 


2007년 7월4일(수요일) 이른 시간에 홉드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수리 중이어서 사진 몇 장만 얻어가지고 발길을 되돌렸다. 이어 1762년에 축조한 만청 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를 찾았다. 만청 정부가 이곳을 분할 통치할 때 설치했던 관청과 주택, 사원 등을 에워쌌던 성채다. 부지 면적이 약 4만㎡에 달하는 꽤 넓은 유적지다. 폭 1.5m에 높이 3m로 지은 성벽의 잔해가 약간 남아 있을 뿐, 관리가 허술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미풍에 흐느적거리는 가지를 수북이 드리운 아름드리 고목 몇 그루만이 외로이 남아서 마냥 통탄스러운 그 옛날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홉드는 17세기 전반 청나라 강희제의 네 차례에 걸친 친정(親征)을 계기로 청나라의 통치기구가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서 관련 유물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유물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 바로 홉드 향토박물관이다. 그래서 수리 중인 박물관 측과 바얀올기에 갔다가 사흘 후 다시 찾기로 약속했다. 약속이 지켜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박물관 문을 노크했다. 다행히 박물관 측은 최선을 다해 수리를 끝내고 일행을 맞이한다. 땅 바닥은 새로이 칠하고 몇 군데는 카펫도 깔아놓았으며 유품들도 깔끔히 전시해 놓았다. 안내원의 해설도 친절하다.


박물관 입구에 놓여있는 개관을 기념해 만들어진 대형 놋쇠 솥에는 ‘대중화민국16년8월 …조(造)’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 1927년에 세워진 꽤 오래된 박물관임을 알 수 있다. 중화민국 시절까지도 이곳에 중국의 행정력이 미쳤음을 말해준다. 유물 대부분은 2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몽골 사람들의 반청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과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근엄한 모습을 한 운동지도자 도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만청 통치자들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각종 형구(刑具)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건릉오십년오월십삼일’이란 한자가 압인된 끔찍한 대형 참수도(斬首刀, 목 치는 칼)가 눈에 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친다. 그밖에 지역사와 관련된 볼 만한 유물들도 여러 점 있다. 


한 시간 남짓 전시품을 돌아보면서 몽골 분단의 통사(痛史)를 피부로 느꼈다. 그러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이 분단의 상징인 호칭부터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몽골이 이른바 ‘내·외몽골’로 갈라져 불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 땅에 이민족의 만청이란 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전대인 명나라 때만 해도 오늘의 몽골 땅 전체를 ‘북원’(北元)이라 부르며 ‘내외’는 없었다. 그러다가 청대에 들어와서 몽골 땅이 청나라 영토의 일부라는 데서 고비사막을 경계로 그 이남은 막남(漠南), 이북은 막북, 이서는 막서의 세 갈래로 찢긴다. 후일 막남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치적 소원관계에 따라 막남을 ‘내몽골’, 막북과 막서를 통틀어 ‘외몽골’로 칭하게 된다. 이러한 호칭이 오늘날까지 합법인 양 회자되고 있는데, 이것은 몽골을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보는 데서 나온 부당한 호칭이다.


홉드 향토박물관 외경.


오늘의 상황에서 굳이 구분한다면, 중국 몽골과 독립국 몽골로 대별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원대와 같이 한인 땅이 몽골인들의 예하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한인들이 몽골 땅 전체를 공식 지배한 경우는 없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한때 쿠룬(오늘의 울란바토르)에 대신을 파견하고 청군을 주둔시킨 일은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관행적으로 써오던 기미정책(羈靡政策)적 성격의 간접통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땅이 마치 역대의 중국 영지인 양 치부하면서 ‘내외’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흔히들 몽골 분단의 발단을 만청의 출범으로만 보는데, 사실은 차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이 그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던 것이다. 17세기 차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필연적으로 만청과의 분쟁을 야기하게 되는데,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자 모두에게 완충지가 필요하다. 그 완충지 희생양이 된 곳이 바로 ‘외몽골’이다. 이때부터 ‘외몽골’을 둘러싼 러시아와 중국 간의 갈등은 줄곧 몽골 분단의 주요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강희제의 치세 연간(1661~1722) 차르 러시아가 천산산맥 이북의 오이라트 부족의 칼단을 사주해 할하(외몽골)를 침공하자 강희제는 세 차례의 친정(親征, 1696~1697)을 단행해 칼단을 패주시키고, 이를 계기로 ‘외몽골’을 자신의 영향권 내에 편입시킨다. 잇따라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과 ‘카흐타 조약’을 체결(1727)해 국경분쟁 문제를 매듭짓고 몽골에 대한 만청의 종주권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권을 맞바꾼다.


1911년 만청을 뒤엎은 신해혁명은 몽골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황색 러시아’의 미몽을 버리지 못한 러시아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몽골의 왕공들과 상층귀족, 활불들과의 비밀거래를 통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모략한다. 그해 12월 ‘외몽골’의 왕공들과 활불들이 쿠룬에 모여 중화민국 참여를 거부하면서 ‘대몽골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이것이 이른바 ‘외몽골’의 제1차 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성립된 새 정권을 ‘복드 칸 정권’이라고 하는데, 국가수반으로 티베트 출신의 제8대 활불 젭춘담바 쿠툭투를 추대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시월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에서 군벌전쟁이 격화되며 일본이 시베리아 간섭전쟁을 발동하는 등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자 이 정권은 오래 지탱될 수 없었다. 10년 후 ‘외몽골’의 활불과 라마, 왕공들이 러시아 백파군을 불러들여 쿠룬을 함락하고 역시 활불 쿠툭투를 군주로 하는 정부를 선포한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이것이 제2차 독립선언이다.


한편 같은 해에 러시아 시월혁명의 영향을 받은 하급군인들과 지식인들은 민족독립을 기치로 한 인민당을 결성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지원하에 백파군을 축출하고 역시 같은 활불을 군주로 한 입헌군주제의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한다. 이어 1924년에 활불이 사망하자 국호를 공화제의 몽골인민공화국으로 개칭한다. 이것이 ‘외몽골’의 제3차 독립선언이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결속되자 ‘외몽골’의 독립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투표자의 97.8%가 독립을 찬성, 결국 국민당 남경정부는 독립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외몽골’의 제4차 독립선언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선언으로 ‘외몽골’은 영영 ‘조국의 품’에서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중국 학자들은 몽골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독립은 19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진 때부터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한편, 국민정부의 치하에 있는 ‘내몽골’에서도 ‘외몽골’의 독립운동과 때를 같이 해 내몽골 실링고르맹 출신의 약칭 덕왕(德王)이라고 하는 덕목초극동로보(德穆楚克棟魯普) 왕공의 주도 하에 자치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가 실행하는 개간을 비롯한 일련의 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내몽골인들의 정서를 타고 주변의 몇몇 왕공들을 규합해 1933년 바이링묘(百靈廟)에서 제1차 자치회의를 열고 자신을 비서장으로 하는 자치기구인 ‘몽정회’(蒙政會)를 출범시킨다. 중국은 ‘동일국가 동일민족’이란 쑨원(孫文)의 국가이념을 계승한 장제스가 중국에는 ‘다른 민족은 없으며, 있다면 동일민족의 다른 종족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몽정회를 승인하나 실질적으로는 지방에서 생긴 한 군벌쯤으로 냉대했다. 그리하여 덕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치를 시도해 봤으나 결국 일본이 조작한 ‘몽강(蒙疆)연합위원회’란 음모에 휘말려 그 환상은 깨지고 만다. 2차 대전 후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가는 틈을 타 덕왕은 1949년 ‘몽골자치정부’를 선포했으나 중공의 권력 장악으로 그의 ‘경화수월’(鏡花水月, 거울 속의 꽃과 물 속의 달) 같은 자치의 꿈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 자리를 우란부(烏蘭夫)가 이끄는 내몽고자치구가 메운다. 이렇게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으로부터 근 800년을 면면히 이어오던 하나의 몽골은 막북의 몽골인민공화국(지금은 몽골국)과 막남의 내몽고자치주로 양분되고 말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된 이후 중국과 소련 간에는 ‘외몽골’ 문제를 놓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져 왔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회담에서 마오쩌둥이 이 문제를 꺼냈으나 스탈린의 냉대로 논의는 더 이상 진척 없이 그저 양국 동맹조약문에 ‘몽골인민공화국’을 공인한다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저우언라이와 흐루시초프 간의 회담에서는 이 문제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못했으며, 그후 국경분쟁 등 양국 간의 관계가 긴장됨에 따라 이 문제를 에워싸고 비방전이 벌어졌으며, 여기에 소련 편을 들어준 몽골인민공화국이 가세함으로써 논쟁은 재연되었다. 


만청통치 시대에 사용한 대향 참수도(斬首刀, 홉드 향토박물관 소장).


그러다가 실용주의자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의 회담(1986)에서 약간의 실마리가 풀려 1992년 소련군이 몽골에서 철수한다. 이를 계기로 몽골문제를 둘러싼 3국 관계는 일시 조정기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또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몽골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몽골이 둘로 쪼개진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 다시 하나로 될 것인가의 여부는 민족자결과 자존의 원칙대로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져야 한다. 몽골의 분단사는 역사의 거울이 될 수 있다. 통절한 교훈은 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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