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15_0010


고구려의 농업 생산력


(二十五年) 二月, 下令减不急之事, 發使郡⋅邑勸農桑.

『三國史記』卷19, 「高句麗本紀」7 平原王 25年



[평원왕 25년(583)] 봄 2월에 명령을 내려 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도록 하고, 사신을 군(郡)⋅읍(邑)으로 내려 보내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25년



이 사료는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이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한 내용으로 당시 고구려에서 농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도성의 입지 조건 중 하나가 ‘오곡(五穀) 농사’에 적합해야 했으며, 「광개토왕 비문」에도 보이듯 왕의 주요 치적으로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농업이 생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삼국지』 「동이전」에 “좋은 토지가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 초기에는 생산이 충분치 못했다. 수렵과 약탈을 통해 농업 생산을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


3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며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4세기에 낙랑(樂浪)⋅대방(帶方) 지역을 비롯한 농경 지역을 차지하면서 농업을 통한 생산 여건은 점차 향상되었다. 특히 5세기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 유역을 확보한 다음부터 농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는데, 평원왕이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구려의 철제 농기구와 농업기술의 발전」,『북방사논총』8,김재홍,동북아역사재단,2005.

『삼국 및 통일신라의 세제 연구』, 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 여호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이현혜, 일조각, 1998.

『한국고대사회경제사』, 전덕재, 태학사, 2006.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g_019r_0060_0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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