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8_0010


부여의 건국 이야기


北夷橐離国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我, 故有娠. 後産子, 捐於猪溷中, 猪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藉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渡, 魚鼈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論衡』卷2, 「吉驗篇」


북이(北夷) 탁리국왕(橐离国王)의 시비(侍婢)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크기가 달걀만 한 기운이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저에게 내려왔으므로 임신을 하였습니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은)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겨 두어 말이 밟아 죽였으면 했지만 말이 다시 입김을 불어 넣어서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하늘의 아들[天子]이 아닐까 의심하고, 그 어미로 하여금 거두도록 하고 노비로 삼아 길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고 그로 하여금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은 달아나 남쪽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렀다. 활로써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엄호수를)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 병은 이를 건널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도읍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북이에 부여국(夫餘國)이 있는 것이다.

『논형』권2, 「길험편」


이 사료는 『논형(論衡)』에 보이는 부여(夫餘)의 건국 신화이다. 『논형』은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 27~100?)의 저서로, 유교의 여러 학설뿐 아니라 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습속⋅속설(俗說)과 같은 다방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부여의 건국 신화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포함해 후대의 많은 사서에도 전해 온다. 하지만 후대의 사서마다 지명 등에서 차이가 나는데, 예컨대 『위략』의 경우 동명(東明)의 출신국이 탁리국(橐离国)이 아니라 고리국(高離國)으로 나오며, 엄호수(掩淲水)를 시엄수(施掩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동명의 출생과 탈출, 그리고 부여의 건국이라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와 내용은 동일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더욱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그 이름마저 같다. 그 결과 위의 사료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부여의 건국 신화가 실제로 존재했는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부여의 독자적인 건국 신화가 존재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두 나라가 동일한 신화를 공유했다고 보거나 고구려가 부여 방면으로 진출하며 부여 지역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 건국 신화를 전유하였다고 이해하는 등 여러 견해로 다시 나누어 진다.



참고문헌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설화와 역사』, 최내옥 외, 집문당, 2000.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0.

『단군-그 이해와 자료-』, 윤이흠 외 공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ko_016_0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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