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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반란군에 맞서다 스러져간 군인 김오랑

김해·정희상 기자 호수 639 승인 2019.12.19 10:36 


김오랑 중령은 12·12 쿠데타를 막아내다 사망했다. 아내 백영옥씨도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생애를 마쳤다. 추모사업회는 무공훈장 추서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오랑 중령의 조카 김영진씨가 11월26일 경남 김해시에 있는 김오랑 흉상 앞에 서 있다. ⓒ시사IN 이명익


1979년 12월12일 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2층 집무실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휘하 부대에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12월13일 0시30분, 중무장한 군인 10여 명이 사령관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왔다. 맨 앞에 선 이는 12·12 쿠데타에 가담한 특전사 3여단(최세창 여단장) 휘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이들은 사령관실에 붙은 비서실로 밀고 들어갔다. 10여 분간 콩 볶는 듯한 M16 소총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12월12일 오후 6시30분 한남동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울린 총성이 쿠데타의 서막이었다면, 특전사령부에서 울린 총소리는 쿠데타 완료를 알렸다.


반란군들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정병주 사령관을 끌어내 군용 지프차에 실었다. 이어서 시신 한 구가 실려 나왔다. 정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1990년 중령 추서)이다. 그는 쿠데타를 온몸으로 막아내다 정병주 사령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여섯 발을 맞고 쓰러졌다. 당시 나이는 35세였다.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곧바로 “12·12 사태 와중에 총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라고 발표했다. 사망자 3명 가운데 한 명이 김오랑 소령이었다(국방부 헌병대 소속 정선엽 병장은 쿠데타 군에 맞서다 숨졌다. 박윤관 일병은 참모총장 공관 초소를 점령한 뒤 해병대가 초소를 되찾는 과정에서 숨졌다).


김 소령에게는 직계 자손이 없었다. 조카인 김영진씨(63)가 해마다 삼촌의 기일을 지킨다. 12·12 쿠데타 당시 음력으로 10월23일이라 올해 기일은 11월19일이었다. 고향 김해에서 김오랑 소령의 40주기 추모제를 치른 김영진씨를 만났다.


“반란군에 희생된 삼촌은 말이 없는데 전두환씨는 아직도 반성은커녕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입니까.” 김씨는 12·12 쿠데타로 풍비박산 난 가족사를 들려주며 오열했다.


김오랑은 1944년 경남 김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65년 육사에 합격했다. 김해농고 출신 첫 합격자였다. 교장이 직접 김오랑의 집을 찾기도 했다. 그의 육사 생도훈육지도부의 종합평가란에는 “가정환경은 경제적 여유는 없으나 화목하고 향후 다른 생도보다 인생관과 국가관 확립의 전망이 뛰어날 것으로 보임”이라고 적혀 있다. 육사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김오랑은 강원도 양구에 있는 2사단 32연대 수색중대에 배치됐다. 1970년에는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 무렵 그는 부산대 간호학과에 재학 중이던 백영옥과 러브레터로 사랑을 키우다 귀국 후 1972년 결혼했다.


김오랑은 1974년 특전사에 배속됐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3공수여단 16대대 19지역대 중대장이 첫 보직이었다. 1979년 3월 김오랑은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74년 사령관으로 부임한 정병주는 대한민국 특전사 체계를 완성한 ‘특전사의 전설’로 불렸다. 정병주 사령관은 김오랑을 높이 평가했다. 육사 동기생들은 ‘예의 바르고 똑똑한 군인, 인맥 관리보다 임무 완수에 철저했던 비서실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12·12 쿠데타 당일에도 김오랑은 군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된 것이다.


김오랑 유족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숙모(백영옥)는 남편의 비보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실명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막내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낸 뒤 2~3년 사이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부인 백영옥씨는 12월12일 특전사령부 장교 관사에서 머물다 총성을 들었다. 백씨는 1988년 펴낸 자전 수기 <그래도 봄은 오는데>에서 이렇게 썼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남편이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 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이의 가슴에 탄환이 박히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터지는 통증이 왔다. 남편은 어마어마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백씨는 12월13일 아침부터 남편의 안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김해에서 올라온 시댁 식구들한테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보안사는 장례식을 거여동 특전사 뒷산에서 치르도록 했다. “그곳이 남편 장례식장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주었다. ‘왜 당신 사진이 여기에 놓여 있어요?’ 시댁 어른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통곡했다.”


“대세에 저항했기 때문에 변을 당했다”


장례식을 치른 후 백씨는 장교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갈 곳이 없어 나갈 수도 없었다. 관사에 머물며 남편의 죽음을 파고 다녔다. 백씨는 당일 비서실에 근무한 당번병을 찾아냈다. 가슴과 배 등에 6발을 맞은 김오랑을 업고 의무실까지 뛰었던 당번병은 상관들의 함구령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백씨의 설득 끝에, 박종규 중령이 지휘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013년 7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군인 김오랑 추모제’가 열렸다. ⓒ연합뉴스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육사 선후배 사이로 친했다. 특전사 장교 관사에서 위아래 층에 살며 부부 동반 모임을 자주 했다. 백씨는 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어떻게 후배의 가슴에 총탄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따져 묻자 ‘김 실장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저항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을 당했습니다’라고 변명했다. (중략) 이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박종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백영옥씨는 새로 부임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남편의 명예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활동 끝에 김오랑은 1980년 2월2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감시 속에 백씨는 더 이상 서울에 머물 수 없어 친정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남편 잃은 충격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 연금에 의지하며 살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듬해 8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이 부인과 함께 백씨를 찾아왔다. 정 전 사령관은 큰아들이 쓴 박사학위 논문을 백씨에게 건넸다. 그 논문의 서문에 ‘고 김오랑 소령을 추모하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백영옥씨는 정병주 전 사령관과 함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투쟁에 나섰다. 정 전 사령관은 그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12·12 쿠데타를 증언했다. 하지만 1989년 3월 경기도 양주군 송추유원지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정 전 사령관이 진상규명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일었다. 노태우 정권의 검찰은 자살로 결론 냈다.


이후 백영옥씨는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김오랑 소령에 대한 1계급 특진서훈 및 보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냈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만났다. 야당까지 나서자, 국방부는 1990년 2월1일 ‘민원인(백영옥)의 요구’라는 단서를 붙여 중령 진급을 추서했다.


백영옥씨는 국가배상 소송도 준비했다. 당시 노무현 의원과 장기욱 변호사 등이 소송을 지원했다. 두 사람은 전두환·노태우씨 등 12·12 쿠데타 세력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도 안내하고 지원했다. 1991년 6월28일 밤, 백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처음에 정병주 장군처럼 숙모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가 우리 유족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실족사’로 수정했다. 그런데 난간 높이가 허리까지 정도인 곳에서 어떻게 실족해 떨어졌다는 말인가?”


백씨를 이어 김영진씨는 ‘참군인 김오랑추모사업회’와 함께 김오랑의 명예회복 운동을 벌이고 있다. 추모사업회는 12·12 쿠데타 당시 반란 진압군 편에 섰던 중령 출신 김광해씨와 김오랑의 특전사 20년 후배 김준철씨 등이 꾸렸다. 이들은 박종규 중령 등 김오랑을 사살한 책임자들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2009년 12월9일 박종규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2·12의 과실을 누린 적은 없고, 항암에 지쳐 누워 있으니 이제 모두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완전한 패배자입니다(2010년 12월 박종규는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김영진씨와 추모사업회 활동으로 김해시에 ‘참군인 김오랑 흉상’도 들어섰다. 나아가 이들은 정부에 김오랑의 무공훈장 추서와 육사 교정 동상 건립 등을 요구했다. 17대 국회와 18대 국회에서 김오랑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결의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하지만 국방부의 비협조로 빛을 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상훈법상 무공훈장 추서는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으로 무공을 세운 자에 해당된다”라며 반대 뜻을 밝혔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가 무공훈장을 보국훈장으로 바꾸자 정부는 2014년 그에게 ‘보국훈장 3·1장’을 추서했다. 김영진씨는 현재 이 훈장을 김해시 활천동 주민자치센터에 기증해 전시하고 있다.


“육사 생도에게 김오랑 정신 가르쳐야”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방부는 김오랑 추모비 건립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이다. 육사에서도 추모비를 건립하는 방안에 대해 “현재 육사에는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강재구 소령, 심일 소령 등 동상이 건립되어 있는 바, 그 대상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라는 부정적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김영진씨와 추모사업회는 육사발전기금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육사발전기금은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정호용, 김진영 등이 이사장을 맡았다. 2012년에는 전두환씨가 육사발전기금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영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삼촌의 희생은 국가 체제와 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반란군에 맞섰던 참군인 정신의 발로였다. 육사 생도들에게 이런 정신을 최우선으로 교육해야 되지 않겠는가. 무공훈장 추서와 육사 교정 추모비가 배척되는 한 김오랑의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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