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30_0030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


[神龜五年春正月] 甲寅, 天皇御中宮, 高齊徳等上其王書并方物. 其詞曰. 武藝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増傾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枝百世. 武藝忝當列國, 濫摠諸蕃,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崖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凶絶問. 親仁結援, 庶叶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 游將軍果毅都尉徳周, 別將舍航等廿四人, 齎状, 并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賎,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還慚掩口之誚. 主理有限, 披瞻未期. 時嗣音徽, 永敦隣好. 於是高齊徳等八人並授正六位上, 賜當色服. 仍宴五位已上及高齊徳等, 賜大射及雅樂寮之樂, 宴訖賜祿有差.


『續日本記』卷10, 神龜 5年 春1月(甲寅)



(신구(神龜) 5년, 무왕 10년, 728년 봄 정월) 갑인(甲寅)일에 천황이 중궁(中宮)에 나아갔는데, 고제덕(高齊徳) 등이 왕의 교서(敎書)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그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예(武藝)가 아룁니다. 산하(山河)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도덕(風敎道德)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明君)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영원장군(寧遠將軍) 낭장(郎將) 고인의(高仁義),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徳周), 별장(別將) 사항(舍航) 등 24명을 보내어 장(狀)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보내어 바칩니다. 토산물이 비록 천하지만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드리는 정성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가죽과 비단이 진귀하지는 않아 도리어 손으로 입을 막고 꾸짖는 데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치를 주장함에는 한계가 있으나 마음을 여는 데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아름다운 소리를 이어받아 길이 이웃과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합니다.” 이에 고제덕 등 8명에게 모두 정6위상(正六位上)을 주고 해당하는 빛깔의 옷을 내렸다. 5위(五位) 이상과 고제덕 등에게 잔치를 베풀고 활쏘기 대회와 아악료(雅樂寮)의 음악을 내렸으며, 잔치가 끝나자 녹(祿)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권10, 신구 5년(728) 봄 1월(갑인)



이 사료는 발해 제2대 왕인 무왕(武王, 재위 719~737)이 727년(무왕 9년)에 일본 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이다. 이를 통해 발해가 당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고자 일본과 외교적 관계를 맺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발해는 당나라는 물론 신라와도 대립하며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당나라는 722년(무왕 2년)부터 발해 북쪽에 있던 흑수 말갈(黑水靺鞨)을 후원하여 발해를 압박하였다. 따라서 발해는 당나라를 경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발해를 견제해 오던 신라도 721년(성덕왕 20년)에 하슬라도(何瑟羅道) 지역의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발해와의 국경 부근에 장성(長城)을 쌓고 발해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 더욱이 나당 전쟁을 겪으면 당과 외교적으로 단절되어 있떤 신라는 703년(성덕왕 2년) 이후 다시 대당 외교를 추진하여 720년대에는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당의 압박을 견제하고 정치⋅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였다. 그래서 건국한 지 약 30년이 지난 727년 8월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국서를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발해 제2대 왕인 727년(무왕 9년)의 일로 이때부터 발해와 일본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발해 무왕이 일본 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길이 이웃과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여, 일본과의 우호와 교류를 원하는 무왕의 뜻을 담고 있다.


727년 일본에 파견된 발해의 사신은 고인과 고제덕(高齊德) 등 24명이었다. 이들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하이에 표착하였다가 고인 등은 해를 당하고 고제덕 등 8명만이 살아남아 같은 해 9월에 출우국(出羽國)에 상륙하였고, 12월에 일본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 다음 해 정월 일본 왕에게 발해의 국서와 예물을 전하였다. 고제덕 등은 일본 방문에 대한 답으로 일본으로부터 관작과 함께 비단류 등의 하사품을 받았으며, 신년하례가 끝난 뒤 초대되어 아악을 듣기도 하였다.


이들은 728년(무왕 10년) 4월 발해 왕에게 보내는 일본 왕의 국서를 가지고 귀국했는데, 일본의 답례 사절과 함께 발해까지 전송을 받았다. 이후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의 한 곳으로부터 일본까지를 잇는 일본도(日本道)가 있었다고 중국 측에 기록될 정도로 공식적인 교섭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기』에는 발해가 일본에 34차례, 일본이 발해에 13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속일본기』에는 신라가 일본에 24차례, 일본이 신라에 24차례 교섭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민간 차원의 교류까지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 간의 공식적인 교류만을 본다면 발해는 신라보다 더 긴밀하게 일본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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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m_002r_0110_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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