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30_0040


일본이 발해에 보낸 외교 문서


[寶龜 三年 二月] 己卯. 賜渤海王書云, 天皇敬問高麗國王. 朕繼體承基臨馭區宇, 思覃徳澤, 寧濟蒼生, 然則率土之濱, 化有輯於同軌, 普天之下, 恩無隔於殊隣. 昔高麗全盛時, 其王高武, 祖宗奕世, 介居瀛表, 親如兄弟, 義若君臣, 帆海梯山, 朝貢相續. 逮乎季歳, 高氏淪亡, 自尓以來, 音問寂絶. 爰洎神龜四年, 王之先考左金吾衛大將軍渤海郡王遣使來朝, 始修職貢. 先朝嘉其丹款, 寵待優隆. 王襲遺風, 纂修前業, 獻誠述職, 不墜家聲. 今省來書, 頓改父道, 日下不注官品姓名, 書尾虚陳天孫僣号. 遠度王意豈有是乎, 近慮事勢疑似錯誤. 故仰有司, 停其賓禮. 但使人萬福等, 深悔前咎, 代王申謝, 朕矜遠來, 聽其悛改. 王悉此意, 永念良圖. 又高氏之世, 兵乱無休, 爲假朝威, 彼稱兄弟. 方今大氏曾無事, 故妄稱舅甥, 於禮失矣. 後歳之使, 不可更然. 若能改往自新, 寔乃繼好無窮耳. 春景漸和. 想王佳也. 今因廻使, 指此示懷, 并贈物如別.


『續日本記』卷32, 寶龜 3年 2月(己卯)



(보구(寶龜) 3년(문왕 36, 772) 2월) 기묘(己卯)일에 발해 왕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천황(天皇)은 삼가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문안한다. 짐이 선대(先代)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림에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두루 미치기를 생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온 천하가 화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고 온 천하가 은혜로워 특별한 이웃으로 격의가 없게 되었다. 옛날 고구려의 전성기 때에 그 왕 고무(高武)는 조상 대대로 바다 밖에 있으면서 형제와 같이 친하고 군신(君臣)과 같이 의로워,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조공(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말기가 되어 고씨(高氏)가 망한 이래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신구(神龜) 4년(무왕 9, 727)에 이르러 왕의 선고(先考)인 좌금오위대장군발해군왕(左金吾衛大將軍渤海郡王)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來朝)하여 비로소 조공을 닦았다. 선조께서는 그 참된 마음을 가상히 여겨 총애하여 대우함이 더욱 두터웠다. 왕은 유풍(遺風)을 계승하고 전왕(前王)의 유업(遺業)을 이어 정성스럽게 직공(職貢)을 닦아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내 온 글을 살펴보니 갑자기 부친이 행하던 법식을 고쳐,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과 성명을 쓰지 않고 글의 말미에 거짓되어 천손(天孫)임을 참칭하는 칭호를 써 놓았다. 멀리 왕의 뜻을 헤아려 보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으며, 가깝게는 일의 형편을 생각건대 착오일 듯 의심된다. 그러므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손님에 대한 예우를 멈추도록 하였다. 다만 사신 만복(萬福) 등은 전의 허물을 깊이 뉘우치고 왕을 대신하여 사죄하므로 짐이 멀리서 온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뉘우치고 고침을 들어 주었다. 왕은 이 뜻을 모두 알아서 길이 좋은 계획을 생각하라. 고씨의 때에는 병란이 그치지 않아 (우리)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하여 그쪽에서 형제를 칭하였다. 바야흐로 이제 대씨(大氏)는 일찍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한 연고로 함부로 외숙과 생질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예(禮)를 잃은 것이다. 뒷날의 사신은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지난날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진실로 우호를 이음이 끝이 없을 것이다. 봄날의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왕은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이러한 마음을 표하고, 아울러 별도와 같이 물건을 보낸다”라고 하였다.


『속일본기』권32, 보구 3년 2월(기묘)



이 사료는 일본 왕이 772년 발해의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에게 보낸 외교문서이다. 그 내용은 8세기 후반 발해와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외교 분쟁을 보여 주는데, 당시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여실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때인 727년(무왕 9년) 일본과 첫 교섭을 시작한 발해가 이후 일본에 두 번째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문왕 3년(739)의 일이었다. 제3대 문왕은 그의 시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대 무왕과는 달리 문치(文治)를 통해 발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문왕은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하면서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해 나갔으며, 대외적으로도 유화 정책을 써서 당나라 및 일본 등과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그런데 문왕 대의 대일 교섭 태도는 이전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예컨대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세 번째 사신인 752년(문왕 16년) 모시몽(慕施蒙) 일행의 경우 발해 왕의 국서를 갖고 가지 않아 일본 조정으로부터 억류될 뻔하였으며, 다음 해 6월 귀국 때에는 일본의 전송 사신 없이 돌아오는 등 양국 간에 사신의 파견과 접대에 있어 불편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동안 양국 간의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를 깨뜨리고 두 나라가 적극적인 교섭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신라 공격 계획이었다.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이 758년(문왕 22년)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고, 발해 역시 이에 대한 답방의 형식으로 제4차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후 일본의 신라 공격 계획이 있던 758년부터 764년(문왕 28년) 사이 발해와 일본 간의 사신 왕래는 매우 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때 이루어진 양국 간의 사신 왕래는 주로 발해를 신라 정벌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은 발해의 중도 하차와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의 확립, 그리고 일본 내부의 사정 등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양국 간의 사신 왕래는 한동안 또다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 사료에 보이는 771년(문왕 35년)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다시 열리게 되었다. 발해는 대사 일만복(壹萬福)을 비롯한 32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일본 외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발해의 사신 일행은 771년 일본에 도착하여 이듬해인 772년 정월에 수도로 들어갔다. 그런데 일본은 이들이 가져온 발해 국서의 내용이 전례에 어긋나고 무례하다고 하여 공식적인 접대를 중지하고 국서와 물건도 수령하지 않았다. 또한 발해 문왕이 국서의 날짜 아래에 일본 신하로서의 관품과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고, 글의 끝부분에는 허망하게 천손(天孫)이라는 칭호를 썼으며, 옛날 고구려 때와 같이 양국 관계를 형제로서 칭하지 않고 ‘외숙과 조카[舅甥]’라고 칭하였다고 하여 발해를 꾸짖고 있다. 이에 발해 사신이 국서의 내용을 고치고 왕 대신에 사과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발해가 이전과 달리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료는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구려가 그러했듯이 천손 의식을 가지고 황제국으로서의 외교적 자신감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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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이미지

견고려사 목간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levelId=ti_011_005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30_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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