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44_0020


정혜공주 묘지


貞惠公主墓誌幷序


……(中略)…… 公主者我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之第二女也. 惟祖惟父, 王化所興, 盛烈戎功, 可得而論焉, 若乃乘時御辨, 明齊日月之照臨, 立極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旁夏禹, 陶殷湯而周文. 自天祐之, 威如之吉.


公主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 嫕瓌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絕倫, 溫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 嫁于君子. 標同車之密 義, 叶家人之永貞. 柔恭且都, 履愼謙謙. 簫樓之上, 韻調雙鳳之聲, 鏡臺之中, 舞狀兩鸞之影. 動響環珮, 留情組紃. 黼藻至言, 琢磨潔節. 繼敬武於勝里, 擬魯元於豪門. 琴瑟之和, 蓀蕙之馥. 誰謂夫聟先化, 無終助政之謨. 稚子又夭, 未經請郎之日. 公主出織室而灑淚, 望空閨而結愁. 六行孔備, 三從是亮. 學恭姜之信矢, 銜杞婦之哀悽. 惠于聖人, 聿懷閫德.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粤以寶曆四年夏四月十四日乙未, 終於外第, 春秋四十. 諡曰貞惠公主. 寶曆七年冬十一月廿四日甲申, 陪葬於珍陵之西原礼也. ……(中略)…… 寶曆七年十一月廿四日.


貞惠公主 墓誌



정혜공주묘지(貞惠公主墓誌) 및 서문


……(중략)……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둘째 딸이다. 생각하건대 고왕(高王), 무왕(武王)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文王)은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무공(武功)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때를 맞추어 정사(政事)를 처리하면 그 밝기가 일월(日月)이 내려 비치는 것과 같고, 기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면 그 어진 것이 천지(天地)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야말로 우순(虞舜)과 짝할 만하고 하우(夏禹)와 닮았으며, 상(商) 탕왕(湯王)과 같은 지혜를 배양하고 주(周) 문왕(文王)과 같은 도략(韜略)을 갖추었다. 하늘에서 이들을 도와주니, 위엄을 베풀어 길하게 되었도다.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받았다. 그녀는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웠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 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漢)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누가 알았으랴,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아들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소년으로서의 나이를 지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衛) 공백(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기량(齊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로움을 품었다. 부왕(父王)에게 은혜를 받아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견고하게 감추어진 배를 쉽게 움직이는구나.


아아, 공주는 보력(寶曆) 4년(777) 여름 4월 14일 을미일(乙未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니, 나이는 40세였다. 이에 시호(諡號)를 정혜공주라고 하였다. 보력 7년(780) 11월 24일 갑신일(甲申日)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陪葬)하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중략)…… 보력 7년 11월 24일.



이 사료는 1949년에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의 육정산 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서 발견된 발해(渤海) 정혜공주(貞惠公主, 737~777)의 묘지(墓誌)이다.


「정혜공주묘지」는 발해 역사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문헌 사료로서, 발해에 대한 기록이 적은 상황에서 발해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유적⋅유물의 실제 연대 기준을 알 수 있는 등 획기적인 의의를 지녔다. 더욱이 정혜공주묘 근처의 진릉(珍陵)이 발해 제2대 무왕(武王)인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의 무덤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정혜공주묘지」는 정효공주(貞孝公主, 757~792) 묘지와 더불어 발해 초기 역사를 규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우선 이 묘지가 발견됨에 따라 육정산 고분군이 발해 초기의 왕실 및 귀족들이 매장된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초기 도읍지였던 동모산(東牟山) 지역이 바로 돈화시(敦化市) 일대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이 동모산에 축성하였다고 하는 산성으로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문헌 기록에는 없는 발해 문왕(文王)의 존호(尊號)가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보력(寶曆)’이 문왕 대의 연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정혜공주묘지」에는 「정효공주묘지」와 아울러 아버지인 문왕을 대왕(大王), 성인(聖人)이라 일컫고 ‘황상(皇上)’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이는 발해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발해가 대외적으로는 자주성과 독립성을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전제 왕권을 추구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밖에 정혜공주의 장례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삼년상으로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정혜공주묘지」는 문헌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문왕 대의 관제(官制)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곧 비문에 기술된 ‘공주(公主)’, ‘동궁(東宮)’, ‘능(陵)’ 등의 문자는 발해에서도 외명부제(外命婦制), 동궁제(東宮制), 능묘제(陵墓制)가 시행되었던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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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정혜공주묘비의 고증에 대하여」,『한국문화』2,송기호,백산학회,1981.

「발해 문자자료의 현황과 과제」,『대동한문학』26,윤선태,대동한문학회,2007.

「해방 후 중국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역사와 사회』8,이종훈,채문연구소,1992.

「발해 〈정혜공주묘지〉와 〈정효공주묘지〉의 서풍」,『서지학연구』43,정현숙,서지학회,2009.

「발해의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2,채희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1988.

『발해문화연구』, 방학봉, 이론과 실천, 1991.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

『발해사의 이해』, 임상선 편역, 신서원, 1990.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Ⅲ,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gskr_011_0010_002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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