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san.grandculture.net/asan/toc/GC07100349


대두산성 (大豆山城)

집필자 : 강종원


이칭/별칭 : 대두성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의 영인산성으로 추정되는 삼국시대 산성.


개설


대두산성(大豆山城)[대두성(大豆城)]은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등장하는 백제 건국 초기의 산성으로 백제가 마한(馬韓)을 병합한 이후 병합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년(온조왕 27) 4월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자 두 성의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고,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476년(문주왕 2) 2월에는 대두산성을 수리하여 한성(漢城) 북쪽의 민호(民戶)를 옮겼다고 한다. 478년(삼근왕 2)에는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는데, 그로 인해 479년(삼근왕 3) 9월에 두곡(斗谷)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때 치소(治所)로서의 기능이 정지되고 대두산성의 명칭도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경위


대두산성은 아산시 영인산[높이 364m]에 있는 영인산성(靈仁山城)으로 비정되며 백제 건국 초기인 9년에 축조되었다. 18년(온조왕 36)에 지금의 아산시 읍내동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대두산성은 탕정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탕정성이 읍내동산성(邑內洞山城)에 비정되므로 대두산성은 이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청남도 공주시, 서천군, 세종특별자치시 등에 비정된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아산 지역으로 비정한다. 아산 지역에서도 구체적으로는 음봉면 수한산성(水漢山城), 영인면 영인산성 등에 비정되고 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지리적 위치나 규모, 백제시대 아술현(牙述縣)의 치소 등을 고려할 때 오늘날 영인산성으로 알려진 산성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형태


대두산성으로 비정되는 영인산성은 아산시 영인면과 염치읍에 걸쳐 있는 영인산 정상 주변에 주로 편축(片築) 기법[능선을 따라 바깥쪽 벽에만 돌을 쌓음]으로 축조된 포곡식(包谷式)[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 감싸고 있는 산성] 석축 산성이다. 둘레가 1,000m이고 내부에 우물 2곳, 연못 등이 있다.


현황


대두산성으로 비정되는 영인산성은 조선 전기에 ‘신성산성(薪城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일부 구간에서 축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아산시 영인면과 염치읍에 걸쳐 있는 영인산은 곡교천 북부에서는 가장 높아 아산만 일대는 물론이고 안성천 북쪽의 경기도 평택시 일대와 삽교천 서쪽의 충청남도 당진시 일대까지 잘 조망되는 전략 요충지이다. 이러한 영인산 정상부에 남아 있는 영인산성은 백제 건국 초기에 축조된 대두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한성에 중심을 두고 지금의 충청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백제로서는 대두산성이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다. 충청남도 북부의 관문이자 내포의 관문 지역에 축조된 핵심적 관방(關防) 시설이라 할 수 있다.


20개의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 아산시는 산성의 고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산성이 많은 편이며, 그중에서도 핵심적 산성이라 할 수 있는 대두산성에 대한 추가 연구를 통해 백제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던 전략적 중요성을 명확히 밝히는 게 중요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일조각, 1988)

『충남지역의 문화유적』5-아산·온양시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1)

『신편 한국사』6(국사편찬위원회, 2002)

『아산시지』1(아산시청, 2016)

이기백,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백제연구』9, 1982)

유원재, 「백제 탕정성 연구」(『백제논총』3,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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