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222150303216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발견, 그 숨막히던 순간

[고구려사 명장면 39] 

임기환 입력 2018.02.22. 15:03 


1979년 충북 중원서 모습 드러낸 중원고구려비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의 발견


1979년 4월 8일, 충북 중원. 입석(立石)마을 입구 선돌에서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자들이 모였다. 해당 선돌은 마을 석축화단에 '七顚八起의 마을'이라고 새긴 돌기둥과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1972년 대홍수 때에 입석마을이 물에 잠겼고 이 선돌도 그때 쓰러졌는데, 이 마을 청년들이 다시 세워 마을의 표식으로 삼은 터였다. 주민들은 이 선돌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었다. 3대째 이 선돌에 치성을 올린 마을 주민도 있었다.


돌이끼를 걷어내고 탁본을 하자, 첫머리에서 '고려 태왕(高麗太王)'이란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다. 선돌이 갑자기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해방 후 금석문 발견의 역사에서 1971년 5월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발견된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고구려 역사에 좀더 다가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가 우리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 자체가 하나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에는 숨은 인물들이 있다. 예성동호회라는 향토문화연구회 사람들이다. 당시 충주 지청에 근무하던 유창종 검사, 장준식 충주북여중 교사, 김예식 충북도청 문화공보실장 등이 예성동호회 회원이었다. 유창종 검사는 현재 평생 수집한 와당 등을 전시한 유금와당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장준식 교사는 충청대를 거쳐 충북문화재연구원장을 지냈다.


예성(蘂城)은 고려시대 충주의 별칭이다. 이름의 내력에는 충렬왕대에 충주 국원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혹은 초석에 연화를 조각하였던 것에서 꽃술 예(蘂)자를 써서 '예성'이란 호칭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1978년 9월 2일 예성동호회에서 중앙의 태극 문양과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는 예성 심방석(信防石·일종의 주춧돌)을 발견하여, 이 설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또 예성동호회에서 보물 1401호로 지정된 봉황리마애불상군도 찾아냈다.


1979년 예성동호회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일을 냈다. 2월 24일 답사길에서 입석마을의 선돌 즉 석비를 확인하다가 글자를 발견하였다. 충주의 전략적 위치상 진흥왕순수비와 같은 비석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기에 깜짝 놀랄 만한 비석의 발견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4월 5일에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찾은 황수영 동국대 교수와 정영호 단국대 교수에게 사전에 연락이 되어 이 석비 탁본을 뜨고 조사하게 되었다. 그 때 신라(新羅), 태왕(太王) 등 다수의 글자를 읽을 수 있었고, 시급히 관련 학자들을 모아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혹시 또 하나의 진흥왕순수비가 아닐까하는 기대는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라는 당시 역사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대발견으로 바뀌었다.


비각 안에 있을 당시 중원고구려비의 모습 : 2012년 이후 중원고구려비의 현재 공식 명칭은 충주고구려비이다. 본문에서는 발견 이후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공식 명칭인 중원고구려비로 호칭한다. 1981년 3월 1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글자가 오랜 세월의 풍상에 희미해졌다. 게다가 비가 화단쪽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길 건너 밭머리의 담모퉁이에 서 있었는데, 이 담모퉁이에는 대장간이 있어 이 비가 벽과 기둥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비의 뒷면과 우측면이 대장간 안으로 향하고 있어서 더욱 심하게 마멸되었던 것인지, 현재 이 두면은 글자를 새긴 흔적은 확인되지만 무슨 글자인지 판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이런 고대 금석문은 글자 판독이 충분하게 이루어져도, 문장에 이두식 표현이 섞여 있거나 세련된 한문 문장을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문장을 해석하기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글자 판독 마저 어려우면 내용 파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전체 730여 자 가운데 200자가량만 판독이 가능한 상황이니, 중원고구려비문에 기록된 내용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어렵사리 판독된 글자가 200여 자나 된다는 것은 금석문 자료 자체가 희귀한 고구려사의 경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지덕지할 만한 수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시 많은 역사학자가 중원고구려비의 탐구에 매달렸다. 판독은 물론 비문의 해석, 이를 토대로 하는 새로운 역사상의 구성 등 다양했다. 각자 이런 준비를 잔뜩 갖추고 6월 9일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에 모였다. 그리고 장장 7시간에 걸쳐 수많은 해석과 제안이 펼쳐지고 토론이 오고갔다. 이때 발표논문과 토론이 단국대 사학과 학술지 '사학지(史學志)' 제13집(1979)에 실려 있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다시 21년의 시간이 흐른 이후, 2000년 여름에 다시 중원고구려비 앞에 역사학자들이 모였다. 1979년 발견 당시 이루어진 판독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보다 진전된 판독을 통해 비문 연구의 돌파구를 얻기 위함이었다. 이때 참여한 학자들은 1979년 발견 당시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보다 한 세대 뒤인 제자뻘 학자들이었다. 필자도 이때 판독 작업에 참여하였다.


4박 5일 동안 진행된 석문 과정은 비문 판독이란 지난한 과정의 쓴맛을 본 시간이었다. 19개 글자를 새로 확인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1979년의 판독문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의 판독문이 길잡이가 되지 않았다면 한 발자국 나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대가(大家)로서 원로 스승들의 학식과 열정에 감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얼마 뒤에 이어진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18년이 흘렀다. 중원고구려비 연구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글자 판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40년 전 연구에서 진전되기 힘들다는 건 뻔한 사실이다. 많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넘치는 세상이니 새로운 판독 기술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을 게다. 기술이 없다기 보다는 관심과 열정이 부족한 것이다. 새 금석문의 발견만이 뉴스거리가 아니다. 중원고구려비도 얼마든지 새로운 발견거리가 될 수 있다. 아직 판독되지 않은 500여 글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역사에 대한 애정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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