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2_002


◎ 고양현(高陽縣)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양주 도호부 고양현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고양현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용산처(龍山處)는 본래 과주(果州)에 속하였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에 【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1년. 】 부원현(富原縣)으로 고쳤으며, 황조향(荒調鄕)은 본래 부평부(富平府)에 속하였었는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부원현·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계사075) 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교하(交河)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한강[大江]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6백 79호, 인구가 1천 3백 1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5명, 선군(船君)이 20명이다.


고봉현의 토성(土姓)이 1이니, 고(高)요, 망성(亡姓)이 4이니, 진(秦)·강(康)·송(宋)·전(田)이다. 행주의 토성이 4이니, 김(金)·기(奇)·은(殷)·전(田)이요, 망성(亡姓)이 7이니, 최(崔)·강(康)·부(夫)·즉(則)·고(高)·나(那)·차(車)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이(李)이다. 부원현의 토성이 1이니, 변(邊)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6천 3백 26결(結)이다. 【논이 좀 적다. 】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唐黍]·메밀·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살남초(殺男草)이다.


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 【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 】 ·성산(城山) 【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劍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 ·봉현(蜂峴)이다.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 】 대자사(大慈寺) 【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 50결을 주었다. 】 압도(鴨島) 【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갓[草薍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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