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322150304837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 이야기

[고구려사 명장면 41] 

임기환 입력 2018.03.22. 15:03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과 그 주변 일대는 고구려시대 왕봉현(王逢縣)이란 행정구역이었다. 우왕현(遇王縣) 또는 왕영(王迎)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의미다. 즉 왕을 만난 곳이라는 뜻이다. 이 외에 개백(皆伯)이란 지명도 함께 전해지는데, 이는 백제시대 지명일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 왕봉현의 이름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만난 곳이므로 왕봉(王逢)이라고 이름하였다."


왕봉의 왕이 바로 고구려 안장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뿐이 아니다. 같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달을성현(達乙省縣)에는 이런 기사가 덧붙여져 있다.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이름하였다."


달을성현 또는 고봉현은 지금의 고양시 관산동과 고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왕봉현과 고봉현, 이 두 지명을 연결하면, 한강변에 연해 있는 지금의 행주 일대에서 북쪽으로 고양시를 지나 공릉천 일대에 걸쳐 있는 지역에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를 담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 기사는 너무 간략해서 단지 두 등장 인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왜 안장왕이 이곳에 왔는지, 한씨 미녀는 누구인지, 안장왕과 한씨 미녀는 어떤 관계인지, 이 둘이 만나 로맨스를 꽃피웠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 아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랑이야기인지 등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욱 이 기록이 일종의 정사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본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지리지에서만 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역사라기보다는 설화적 성격이 짙게 풍기기도 한다. 그래도 왜 하필 안장왕이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이런저런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서인지, 신채호는 해상잡록(海上雜錄)이라는 옛 문헌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조선상고사'에 수록하고 있다. 지면 여건상 여기서는 간략하게 줄거리만 소개하도록 하고,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조선상고사'를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꼭 안장왕과 한씨 미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일독의 가치가 충분히 넘치는 책이다.


이 책의 안장왕 이야기는 이렇다.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 시절에 상인 행장을 하고 백제땅 개백(皆伯)으로 놀러갔다. 당시 그 지방 한씨의 딸 주(株)는 절세 미인이었다. 안장왕이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해 한씨 집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한주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리고 고구려로 떠나면서 자신은 고구려 태자인데, 나중에 개백 땅을 취해 한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개백현 백제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탐하여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한주가 완강하게 거절했다. 분노한 태수는 그를 옥에 가두고 위협하고 감언으로 꾀었다. 한주는 옥중에서 정몽주의 시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단심가를 부르면서 자신의 굳은 뜻을 꺾지 않았다. 왕이 된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관작 등을 포상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자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安鶴)공주와 사랑하던 사이인 장군 을밀(乙密)이 나섰다. 을밀은 한미한 가문 때문에 왕실과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조건으로 안학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안장왕의 허락을 얻은 을밀이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땅에 들어갔다, 마침 개백 태수의 생일 잔치날에 끝까지 태수의 요구를 거부한 한주를 죽이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한주를 구하고, 개백현과 그 일대를 차지하여 안장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안장왕과 한주가 다시 부부가 되고, 을밀과 안학공주도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위 이야기는 춘향전과 모티브가 유사하다. 또 정몽주로 알려진 단심가를 한주의 노래라고 하는 등 후대에 가필된 흔적이 많아 전하는 이야기 그대로 고구려 시대의 역사나 설화로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하는 설화의 골격에 보다 풍부한 내용이 후대에 거듭 더해지면서 전승된 이야기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안장왕과 한씨 미녀 기사는 통일신라 성덕왕대의 명문장가 김대문(金大問)이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한 시절에 지은 '한산기(漢山記)'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기'는 통일신라의 한산주 즉 한강 하류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승과 풍물 등을 기록한 책으로 짐작된다. 도미 부부의 이야기 등도 '한산기'에 수록돼 있었을 것이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 이야기가 설화적 성격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간략한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다. 장소와 두 인물이다. 왜 지금의 행주와 고봉산 일대가 주 무대이며, 안장왕과 한씨 미녀가 두 주인공인가란 점이다.


행주산성과 한강 /출처=고양시청 티스토리(http://goyangcity.tistory.com/156)


왕봉현 즉 행주산성 앞 한강을 삼국시대에는 왕봉하(王逢河)라고 불렀는데, 나당전쟁 중인 673년(문무왕 13년)에 당나라 군사가 거란,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왔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왕봉하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왕봉현 일대가 군사전략상이나 교통로상의 요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떠올리면 이 일대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고봉산 일대도 한강 하류에서 육로로 파주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고봉산성과 고봉산 봉수대가 설치된 군사상의 요지인 이유다. 즉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은 한강 하류의 요충지로서 백제에 대한 안장왕의 군사활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529년 10월에 안장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변의 혈성(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백제 성왕도 좌평(佐平) 연모(燕謨)와 3만 군대를 보내 대항케 하였다.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백제군 2000여 명을 전사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곡원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일대이다.


오곡원 전투는 장수왕의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 최대 규모였다. 당시 백제군 3만명은 성왕이 신라 관산성 전투에서 동원한 군사 규모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 공격을 위해 동원한 군사도 그 정도다. 3만 군대라는 규모만으로도 오곡원 전투를 치르는 백제군의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오곡원 전투는 백제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역관계를 다시금 결정짓는 전투였다. 그런 점에서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과연 황해도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적지 않다. '삼국사기'의 오곡원 전투 기록이 백제 측 전승자료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성시대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백제 왕실의 염원을 담은 기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한씨 미녀와 관련된 전승을 함께 생각하면 안장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확보하였던 군사활동이 행주 일대의 전승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안장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커다란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겠다.


이 오곡원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안장왕은 그동안 역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요즘 그를 다시 불러내는 데에 한씨 미녀와의 로맨스 이야기가 일정하게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한씨 미녀는 누구이고, 왜 안장왕은 그런 로맨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일까? 거기에 담긴 역사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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