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628152106388


온달 이야기가 보여주는 삼국시대 다양한 인간상

[고구려사 명장면 48] 

임기환 입력 2018.06.28. 15:21 


지난 2회에 걸쳐 우리는 온달 설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찾아보았다. 그 결과 온달은 실존 인물이며 그가 평원왕의 공주와 결혼한 것도 사실일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온달 설화의 핵심은 꾸며진 이야기에 있다. 온달 설화가 시대를 너머 생명력 있게 전해진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온달 설화가 갖는 풍부한 이야기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모습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제 그런 인간상을 만나보자.


온달과 평강공주의 파격적인 결혼은 당시 세인들의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람 입에 오르내리면서 '울보'인 공주가 궁을 나와 '바보'인 가난한 온달과 결혼하였다는 식으로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덧붙여졌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그런데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그 이야기에는 당시 사회적 현실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깐 온달전을 인용해보자.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왕) 때 사람이다. 용모가 여위어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오고 가니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에 차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에 이르렀다. 황금 팔찌를 팔아 전택, 노비, 우마, 기물을 사들이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전공을 논할 때에 모두들 온달의 공이 제일이라 하였다. 왕이 온달을 칭찬하고 "이 사람은 나의 사위라"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삼국사기' 온달전)


우리는 위 이야기에서 온달의 사회적 위치가 바뀌어 가는 과정을 통해 고구려 시대에 살았던 여러 유형의 신분과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첫째, 처음에 온달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밥을 빌어 먹거나 마를 캐어 내다 팔면서 살아가듯 가난한 일반 백성이다. 온달이 경제적으로는 몰락한 존재라 하더라도 신분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였음이 눈길을 끈다. 어느 시대나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평민이다.


둘째, 가난한 온달이 공주와 혼인하여 황금 팔찌를 팔아 집과 전답, 노비를 마련한 것처럼 새로이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있는 부민 계층이다. 온달 설화를 뒷받침하는 진정한 주인공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째, 온달이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전공을 세우고 벼슬을 받은 것처럼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관료가 되는 새로운 계층도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왕권의 지지 아래 성장하여 기존의 귀족계급과는 다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넷째, 위 설화에서는 가난하고 미천하지만 자유민이었던 온달이 부자가 되고 신분을 상승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현실 사회에서 이들은 오히려 노비 등 천민으로 신분이 떨어지는 일이 보다 비일비재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온달 설화를 통해 당시의 사회 변동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설화가 형성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은 어떠하였을까?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시기에 삼국 사회에는 커다란 사회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회 분화가 촉진되어 바보 온달처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계층도 나타나는가 하면 공주와 결혼한 온달처럼 상당한 토지와 부를 소유한 부민층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또 다른 설화로는 백제 무왕과 관련된 서동설화를 들 수 있다. 마를 캐어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세째 딸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거짓 노래를 퍼뜨리고 이 때문에 궁에서 쫓겨난 공주와 결혼한다. 공주가 왕궁에서 갖고 나온 황금을 팔아 살림살이를 마련하고자 하였을 때 서동은 비로소 집 곁에 쌓아 둔 돌덩이가 황금임을 알게 된다. 관련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진평왕도 할 수 없이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는데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잣돈으로 주었다. 함께 백제까지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어 놓고 장차 살림 꾸릴 일을 의논하는데 서동이 웃으면서 "이게 무슨 물건이요?"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이 황금만 있으면 한평생 부자로 살 수 있소"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데는 이것을 내다 버려 흙더미처럼 쌓였소" 하였다. 공주가 크게 놀라면서 "이것은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이요, 당신이 지금 황금 있는 데를 알거든 그 보물을 부모님 계신 궁궐로 실어 보냈으면 어떻겠소?" 하였다.


위 서동 설화에서도 서동이 공주와 결혼해 마치 황금을 횡재하여 부자가 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의 부 축적 과정이 조상 대대로 권세를 누려 왔던 귀족세력과는 달랐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온달과 서동이 황금을 소유하였다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온달이나 서동은 일단 공주가 궁을 나오면서 몸에 지니고 나온 황금 때문에 부자가 된다. 선화공주의 말대로 당시에도 황금은 평생을 부자로 살 수 있는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황금이 이처럼 일반 민에게까지 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을까?


고대사회 초기에는 황금이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당시는 황금 제품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을 극히 한정함으로써 최고 신분층의 상징, 권위와 위엄의 상징 의미를 지녔다. 백제 무령왕릉이나 신라고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금관이나 금제 장식품 등은 모두 왕실이나 최고 귀족층이 사용하는 유물이었다. 그런데 위 설화에서는 황금이 더 이상 특정 신분층의 향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온달은 공주의 금팔찌를 팔아 저택과 전답은 물론 노비와 우마까지 마련한다. 이제 황금은 신분적 의미보다는 교환가치를 갖는 재화로서 경제적 가치가 보다 중요해졌다. 물론 삼국시대에는 여전히 황금이 왕실 등 최고 신분층에서 향유되었기 때문에 위 설화와 같은 황금에 대한 인식은 좀 더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금을 획득한 온달과 서동을 통하여 6세기 전후 새로이 부를 축적하며 성장하는 부민층의 존재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겠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 고구려의 상무적 분위기에서 온달처럼 수렵 행사를 통해 신분 상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달이 무인으로 출신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새로 성장하는 부민층이 단지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만 만족하였을 리 없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쉽지는 않았겠지만 정치적 진출과 성장도 꾀해 갔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경제 기반이 곧 정치적 진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관료로서 국가 지배세력 내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관료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구당서>>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풍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미천한 집까지도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고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이 기록처럼 고구려의 경당은 일반 평민 자제들이 활쏘기 등 무예를 닦고 독서를 통해 유교적 소양을 기르는 곳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층은 경당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고, 위 온달전 내용처럼 수렵 행사나 대외 전쟁을 통해 그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때로는 관직을 얻어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달이 왕의 사위가 되었다거나 또는 태형의 벼슬에 올랐다는 전승은 적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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