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05114


'코리아 민족시인' 윤동주, 뭔가 다르다고 느꼈나요?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교토편 ]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윤동주 시비

20.01.26 19:24 l 최종 업데이트 20.01.26 19:24 l 김보예(kr1004jp)


日帝憲兵(일제헌병)은 冬(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마리 鯉魚(잉어)와 같은

朝鮮(조선) 靑年詩人(청년시인)을 죽이고

제나라를 亡(망)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시인 정지용 서문 中, 1947.12.28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윤동주 시비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인 1위로 윤동주가 꼽혔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2월에 태어나 2월에 눈을 감은 윤동주. 어쩌면 1월은 그에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하늘 속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그런 달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1월에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일본 교토에 있는 미션 스쿨)을 찾았다.



▲ 도시샤 대학(이미데가와 캠퍼스) 서문 .ⓒ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윤동주 시비(詩碑)는 도시샤 대학의 이마데가와(今出川) 캠퍼스에 세워져 있다. 지하철 이마데가와 역 3번 출구에서 나와 도보 1분 정도 걸으면 도시샤 대학 서문이 나온다. 서문은 윤동주 시비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문이기도 하다.


서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빨간 벽돌로 된 채플이 보인다. 송우혜(1998)의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도시샤 대학의 채플은 1930년대에 일본 전국에서 두 대밖에 없었던 파이프 오르간 중 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재학 시절 채플을 자주 오갔을 것이다.

 

▲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채플 .ⓒ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한국·북한·일본을 하나로 잇는 시인 윤동주


윤동주 시비는 캠퍼스 내 메인 거리에서 왼쪽 즉, 채플 방향으로 꺾인 서브 거리에 설립되어 있으며, 시비는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윤동주 시비의 설명문에는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 시인이기도 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코리아의 민족시인'. 당연하면서도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다.


이원종(2019) <同志社大学における尹東柱詩碑建立の経緯と意義-ワンコリアの夢と新島精神の遭遇->(도지샤 대학의 윤동주 시비 건립의 경위와 의의-원코리아의 꿈과 신도 정신의 조우-)에 의하면, 윤동주는 남북에서 인정받고 있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윤동주 시비 .ⓒ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1995년,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설립할 당시 남북의 학생들이 힘을 모아 시비를 설립하였으며, 한반도를 칭하는 어휘로 '코리아'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 시비의 오른쪽(남쪽)에는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가, 왼쪽(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상징화 진달래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시비 앞(서쪽)에는 윤동주가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을 채플이, 시비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일본의 상징화 벚꽃이 심어져 있다. 이원종(2019)은 시비에는 윤동주를 통해 한국, 북한, 일본이 우정어린 교류로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길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전하였다.


윤동주 시비의 옆에 보면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설립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연못 속에는 잉어가 살고 있다.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를 겨울에 피는 꽃과 차가운 얼음 아래를 유유히 헤엄치는 한 마리의 잉어에 비유하였다. 연못은 정지용 시인의 시적 표현을 상징화하여 만들어 놓은 듯하였다.


정지용 시인은 도시샤대학의 영문학을 졸업한 윤동주의 선배이자, 윤동주가 북간도에 있을 때부터 존경하고 좋아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 시인에 대한 윤동주의 마음은 특별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정지용 시비 . ⓒ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윤동주에게 연희전문학교 시절 4총사(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정병욱)로 불리는 친우가 있었다. 해방 후, 친우 강처중은 정병욱이 어머니께 보관을 부탁한 윤동주의 육필 원고(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적은 시)와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가 자신에게 보낸  5편의 시, 그리고 그 외의 윤동주의 습유작품(拾遺作品)을 모아 총 31편의 시가 담긴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발행을 진행한다. 윤동주의 시집 제목은 윤동주의 육필 원고의 제목이자 졸업 기념 자선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그대로 땄다.

 

▲ 영화 "동주" 속 정지용 시집을 선물 받고 좋아하는 윤동주(스틸컷) . ⓒ (주)루스이소니도스

 

1948년 1월 간행된 초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서문을 쓰고, 동기 강처중이 발문을 달았다. 서문을 연희전문학교 은사인 이양하 교수(1904~1963)가 아닌 정지용 시인에게 부탁한 것으로 보아, 살아생전 윤동주가 정지용 시인을 각별히 좋아했던 것 같다.


윤동주는 <정지용 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 1936년 3월 19일을 시집 내지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숭원(2016) <정지용 시가 윤동주에 미치는 영향>에 의하면, 1938년 이전의 윤동주의 습작시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정지용 시인이었기에, 그에게 윤동주는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했던 것 같다.


송우혜(1998)에 의하면 1939년 10월에 윤동주와 함께 정지용 시인을 찾아뵀다는 라사행 목사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서로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단정되어 왔다. 왜냐면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에는 그가 윤동주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詩人(시인) 尹東柱(윤동주)를 몰랐기소니 尹東柱(윤동주)의 詩(시)가 바로 "詩(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虎皮(호피)는 마침내 虎皮(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 것이나, 그의 "詩(시)"로써 그의 "詩人(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시인 정지용 서문 中, 1947.12.28


초판 간행 이후, 1955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증보판이 간행되었다. 증보판은 낸 시기는 6.25전쟁이 끝난 직전으로 남과 북의 이념이 강하게 부딪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증보판에는 월북한 정지용 시인의 서문과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거물이었던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고, 윤동주 시만 홀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다.


당신의 흔적이 꽃이 될 예정입니다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윤동주의 시비는 1년에 약 2만 명 정도의 추모객이 방문하고 있다. 지금까지 취재하러 다니면서 사람의 온기를 따스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발자취였다. 추모객들이 한마디 한마디 남긴 추모노트는 출판 서적으로 발행 추진 준비 중이다. 소중한 마음과 마음이 모여 남긴 흔적은 冬(동) 섣달의 꽃이 될 예정이다.


두꺼운 얼음 아래 차디찬 강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한 마리의 잉어 같은 당신이 머문 곳에는 늘 冬(동) 섣달 꽃이 피길 바란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윤동주 시바를 방문한 추모객들이 남긴 추모노트 . ⓒ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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