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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동의 상실과 멸망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거란 태조는 924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약 1년 3개월에 걸쳐 서방 정벌을 완수한 뒤 곧바로 발해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발해는 단 한 번의 공격에 멸망된 것은 아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다. 遼(요)의 東京 遼陽府(동경요양부)를 두고 태조가 20여 년간 힘써 싸워서 얻은 곳이라고 한 것은145)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거란은 발해 중심부에 대한 공격에 앞서서 먼저 遼東(요동)으로 진출하였다. 8세기 중엽에 일어난 安祿山(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요동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이 급속히 붕괴되어 갔고, 이를 틈타 발해가 이곳으로 세력을 뻗쳤다. 발해는 3대 문왕 시기에 蘇子河(소자하)와 渾河(혼하) 유역으로 진출하여 木底州(목저주)와 玄菟州(현도주)를 두었고, 9세기 전반인 10대 선왕 때에 와서 요동으로 재차 진출하여 그 영역이 적어도 요양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요동지방의 대부분이 발해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료에서 요동을 ‘渤海之遼東’(발해지요동)으로 표현하였고,146) 요의 동경이 원래 발해 땅이었다고 하였으며,147) 그 밖에<賈師訓墓誌(가사훈묘지)>에서도 요동이 발해의 소유였음을 밝히고 있다.148) 따라서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 이전에는 발해 소유였음이 분명하다.


거란이 요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에 들어와 거란 태조가 정권을 잡은 뒤였다. 먼저 北女眞(북여진)을 복속시키기 위해서 903년과 906년 두 차례에 걸쳐 遼河(요하) 상류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908년에 鎭東(진동)의 바닷가에 長城(장성)을 쌓아 요동 남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909년에는 태조가 직접 요동에 행차하였다. 911년에 奚(해)와 霫(습)을 멸하면서 마침내 그 영역이 동쪽으로 바닷가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요동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완전히 확보되었다.


918년 12월에 태조가 요양의 옛 성에 행차하면서부터 요양지방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은 발해가 소유하고 있던 요양을 격파하고 그 주민을 上京道(상경도)로 옮겼기 때문에 이곳이 빈 채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2월에는 이 성을 수리하고 漢人(한인)과 渤海人(발해인) 포로를 옮겼고, 이곳을 東平郡(동평부)으로 삼아 防禦使(방어사)를 두었다. 이리하여 이곳이 요동지배의 요충지로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서 발해가 반발하여 924년 5월에는 遼州(요주)(현재의 遼寧省 新民縣/요동성 신민현)를 공격하여 刺史 張秀實(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탈취해온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요동지방은 여전히 거란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았다. 거란이 924년 7월에 발해가 소유하였던 요동을 공격하였다가 그 해 9월에 아무 소득없이 철군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149) 이 때 발해는 스스로 거란의 공격에 대응하는 한편으로 女眞(여진)·回鶻(회골)·黃頭室韋(황두실위)를 부추겨 협공하도록 하였다.150) 거란 태조는 이 무렵에 서방 정벌에 나가 있었으므로 그가 직접 공략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니, 서방 원정을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꾸준히 요동을 경략하다가 925년 9월에 서방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뒤에 곧바로 발해 공격에 나섰다. 서방 정벌이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행해진 것이었던 만큼, 12월 16일에 조서를 내려 발해 공격을 표명하고 직접 발해 중심부의 공략에 나섰다. 이 공격에는 회골·신라·吐蕃(토번)·党項(당항)·室韋(실위)·沙陀(사타)·烏古(오고) 등도 상징적으로 참여하였다. 아울러 배후세력의 가능성이 있는 후당에 梅老鞋里(매로혜리)를 사신으로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151)


거란의 공격과정에 대해서는≪遼史(요사)≫本紀(본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52) 거란은 윤12월 4일에 木葉山(목엽산)에 제사를 지낸 뒤, 14일에 烏山(오산)에서 靑牛(청우)와 白馬(백마)로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閱兵(열병)을 행하였다. 21일에는 撒葛山(살갈산)에 나아가 鬼箭(귀전)을 쏘아 발해 공격의 출발을 알렸다. 그 해 마지막 날인 29일 商嶺(상령)에 이르러 밤에 발해 扶餘府(부여부)를 포위하였으니, 9일 동안에 무려 천여 리를 행군하였다. 이 때의 행군 경로는 발해의 契丹道(거란도)와 일치할 것이다. 따라서 거란 수도가 있던 현재의 巴林左旗(파림좌기/바린좌기),(林東/임동)에서 출발하여 西遼河(서요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開魯(개로), 通遼(통요)를 거친 뒤에 다시 東遼河(동요하)를 거슬러 올라가 懷德(회덕)을 거쳐 부여부가 있던 農安(농안/눙안)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이듬해인 926년 정월 3일에 마침내 부여부를 함락시켰는데 포위한 지 만3일 만이었다. 부여부는 거란으로 가는 경유지이면서, 한편으로 항상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던 곳이다. 부여부 아래에는 强師縣(강사현)이 있는데,153) 그 명칭으로 보아서도 발해가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생각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부여부는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이다. 이로 보아서도 발해 멸망에는 내부적인 요인도 개재되어 있었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거란은 부여부를 함락시킨 뒤 발해 老相(노상)이 이끄는 3만 군대와 조우하여 이를 격파시켰다. 그리고 破竹之勢(파죽지세)를 이용하여 곧바로 발해 수도의 공략에 나서서, 부여부를 함락시킨 지 만6일 뒤인 정월 9일에 발해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이 과정을 보면 노상이 이끄는 3만 군대가 주력 군대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이 부여부 부근에서 격파됨으로써 발해 수도인 忽汗城(홀한성)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어쩔 수 없이 12일에 발해 왕이 항복을 청하였고, 14일에 정식으로 항복 절차를 밟음으로써 마침내 멸망하였다.


멸망에 즈음한 당시의 발해사회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하여 발해 말기에 기강이 이완되어 갔던 모습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첫째, 발해의 지배를 받던 寶露國(보로국)이나 黑水(흑수)·達姑(달고) 등의 족속이 점차 발해에서 이탈해가는 현상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 때에 이들 족속들은 독자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거나 혹은 고려에 내투하거나 중원 왕조에 조공하였다.154) 이러한 현상은 886년에 보로국과 흑수국이 신라와 和通(화통)하고자 한 데서부터 나타나지만,155) 918년에서 92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발해 사신의 망명 사건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일행 가운데에서 망명한 사건이 두 차례 있는데, 하나는 810년에 首領 高多佛(수령 고다불)이 이탈한 사건이고,156) 다른 하나는 920년에 4명이 망명한 사건이다.157) 그런데 공교롭게도 앞의 사건은 발해에 내분이 빈번하던 시기이고, 뒤의 사건은 멸망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망명 사건은 발해사회 내부의 기강 해이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발해 말기의 사회에 다소 허무주의적인 기풍이 감돌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 徐夤(서인)이 지은<斬蛇劍賦(참사검부)>,<御溝水賦(어구수부)>,<人生幾何賦(인생기하부)>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金(금)으로 써서 병풍을 만들어 놓은 사실에서 추정할 수 있다.158) 이들의 주제는 당나라 말기의 사회 모습을 비판한 것들로서,159) 당시에 발해사회의 분위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발해의 멸망 원인을 살펴보자. 발해가 거란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버린 원인에 대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왔다.160) 그 원인을 직접적으로 증언해 주는 자료는 없지만, 크게 보면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의 두 가지 방면에서 얘기할 수 있다. 외적 요인으로는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거란의 침공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 다음으로 내적 요인으로는 정치적 內紛(내분)을 손꼽을 수 있다. 발해에 내분이 일어났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耶律羽之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야율우지가 表(표)를 올려 말하기를 ‘…先帝(선제)(太祖/태조)께서 발해가 離心(이심)해진 것을 틈타서 군사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하였다(≪遼史≫권 75, 列傳 5, 耶律羽之(야율우지)).


여기서 이심하였다는 것은 발해에 내분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부여부가 쉽게 함락된 것도 이러한 내부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황태자인 耶律倍(야율배)가 파죽지세를 이용하여 발해 수도를 공략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하였고, 실제로 이 말이 맞아떨어졌다.161)


또 다른 증거로 흔히 발해인의 고려 망명 사건을 들기도 한다. 발해가 멸망한 것이 926년(고려 태조 9) 정월인데, 그 이전인 925년 9월 6일과 10일, 12월 29일의 세 차례나 망명 사건이 있었다.162) 그리고 이들의 직책을 보면 禮部卿(예부경), 工部卿(공부경), 司政(사정)과 같은 장관이나 차관을 비롯한 문무 고관들이 포함되어 있고, 성씨를 보더라도 왕실 인물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이끌고 온 백성들도 500명, 100戶(호), 1천 호 등으로 대규모였다. 이러한 사실은 내분의 규모가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16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는 거란의 침공이라는 외적 상황과 정치적 내분이라는 내적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926년 정월에 23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宋基豪>





145) ≪遼史≫권 28, 本紀 28, 天祚皇帝 天慶 6년 정월 병인.

146) ≪舊五代史≫권 137, 外國列傳 1, 契丹.

≪資治通鑑≫권 273, 後唐紀 2, 同光 2년 7월.


147) ≪遼史≫권 28, 本紀 28, 天祚皇帝 天慶 6년 정월 병인·권 36, 志 6, 兵衛 下, 五京鄕丁 및 권 38, 志 8, 地理 2, 東京道.

葉隆禮,≪契丹國志≫권 10, 天慶 6년 봄.


148) 羅福頤,≪滿洲金石志≫권 2(≪石刻史料新編≫1집 23책, 臺北 ; 新文豊出版公司, 1982).

149) ≪資治通鑑≫권 273, 後唐紀 2, 同光 2년 7월·9월.

≪舊五代史≫권 32 참조.


150) ≪五代會要≫권 29, 契丹.

≪冊府元龜≫권 995, 外臣部, 交侵.


151) ≪資治通鑑≫권 274, 後唐紀 3, 天成 원년 정월.

≪五代會要≫권 29, 契丹.


152) 발해 공격과정에 대해서는 趙評春,<遼太祖攻滅渤海時程考>(≪學習與探索≫1986­6) 참조. 그러나 거란 태조가 3軍으로 나누어 발해를 공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일부 日干支(일간지)의 날짜 표기도 잘못되었다.


153) ≪遼史≫권 37, 志 7, 地理 1, 上京道 및 권 38, 志 8, 地理 2, 東京道.

154) 이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권 82,≪高麗史節要≫권 1,≪五代會要≫권 30,≪冊府元龜≫권 972 및 권 999 등에 보인다.


155) ≪三國史記≫권 11, 新羅本起 11, 헌강왕 12년 봄.

156) ≪日本紀略≫前篇 권 14, 嵯峨天皇 弘仁 원년 5월 병인.

157) ≪扶桑略記≫권 24, 醍醐天皇 延喜 20년 6월 26일.

158) ≪全唐詩≫11函 1冊, 徐夤.

159) 金武植,<渤海 文學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碩士學位論文, 1992), 11∼12쪽.

160) 三上次男,<渤海國の滅亡事情に關する一考察-渤海國と高麗との政治的關係を通じて見たる->(≪和田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951 ;≪高句麗と渤海≫, 東京 ; 吉川弘文館, 1990).

방학봉,<발해의 멸망원인에 대하여>(≪발해사연구≫1, 연변대학출판사, 1990).

金恩國,<渤海滅亡에 관한 재검토-거란 침공과 그 대응을 중심으로->(≪白山學報≫40, 1992), 88∼93쪽.


161) ≪遼史≫권 72, 列傳 2, 宗室 義宗倍.

162)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8년 9월 병신·경자·12월 무자.

163) 이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내분이 크게 일어났다고 해도 멸망되기 전에 장관을 비롯한 발해의 중추 세력들이 대규모로 망명했겠느냐 하는 점 때문이다(박시형 저·송기호 해제,≪발해사≫, 이론과실천, 1989, 113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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