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7326.html


서양 역사 속 훈족은 왜 악인이 되었을까

등록 :2020-02-07 05:00 수정 :2020-02-07 11:01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9) 흉노는 유럽을 정복했을까?


‘게르만족의 대이동’ 불러온 훈족의 유럽 진출 이후 동양인에게 악마 이미지 덧씌워

흉노와 훈은 유목문화 공유한 민족일 뿐…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핑계 동양인 차별 우려


알란을 침략하는 훈족. 1870년 그림으로 이때부터 훈족에는 청나라 시기 중국인의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황화(黃禍, Yellow peril)의 본격적인 등장이다.


서양사에서 중세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게르만족의 대이동’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서기 4~6세기에 강력한 기마문화를 가진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연쇄적으로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활동에서 유래했다. 유라시아 고고학에서는 이 시기를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부른다. 게르만족이 아니라 유라시아 동쪽 흉노에서 시작한, 전체 유라시아를 뒤흔든 변혁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동남쪽 신라에서는 북방계의 화려한 황금과 고분이 등장했으며,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던 다양한 나라가 등장했다. 최근 고고학과 유전자(DNA) 분석으로 흉노에서 훈으로 이어지는 800여년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이들은 발달한 철제무기와 기마술로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으로는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역사를 바꾸었다. 서양인들이 막연하게 동양에서 밀려온 공포의 아시아인이라고 비난했던, 동쪽으로는 한반도에서 서쪽으로는 유럽에 이르는 진정한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그들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아틸라와 로마 교황 레오가 만나는 장면. 1514년에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로, 천사들이 훈족을 저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 이들은 만난 적이 없다. 출처 위키피디아


흉노에서 비롯한 세계사의 변동


중국의 한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이웃인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밀렸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엄청난 양의 조공품과 공녀를 매년 바치면서 뒤에서는 흉노의 분열을 기도했다. 그 결과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했고, 한무제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흉노의 힘을 누를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중국에 귀의를 거부한 북흉노 세력은 서쪽으로 도망가다가 서기 98년 알타이산맥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패하여 중앙아시아로 도망쳤다. 이후 북흉노는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근처에서 머물다가 다시 서쪽으로 도망쳤고, 서기 158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서기 350년께 동유럽에 정체불명의 훈족이 등장했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변경에서 살고 있었던 알란족을 침략했고, 파죽지세로 밀려왔다. 훈족의 강력한 화살과 날렵한 기마 부대를 당할 유럽의 나라는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훈족을 ‘신의 저주’라 부르고 하느님의 도움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결국 서기 453년에 훈족의 왕 아틸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정벌하던 중 급사해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 대신 훈족의 날랜 기마술과 강력한 무기에 자극받은 동유럽의 여러 민족이 발흥하여 로마를 압도했으니, 이것이 서양의 고대 세계를 끝낸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


아틸라가 이끌던 ‘훈’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흉노다. 비록 흉노 제국은 중국에 멸망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발달한 군사조직과 철제무기는 세계 최강이었다. 이에 자극받아 유라시아 각지에서 발흥한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동쪽의 신라도 그중 하나였다. 실크로드를 대표하며 발해와 신라를 넘나들었던 소그드국은 자신을 훈의 나라(溫那沙)라고 했다. 심지어 유럽인 계통이었던 에프탈(Hephthalites,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인도 스스로 ‘백인 흉노’(White Huns)라고 칭할 정도였다.


7~8세기 유럽으로 건너온 동아시아의 등자와 마구.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 강인욱 제공


이렇듯 흉노의 후예들은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유목민들은 토지를 기반으로 성립했던 농경사회와 달리 유목이 가능한 초원지대를 찾아서 이동했기 때문에 여러 집단이 섞여 있었고, 유목민이 이동할 때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계약사회였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들을 묶어낸 것은 혈연이 아니라 발달한 무기와 황금 예술이었다. 유라시아 초원에서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들은 700여년간 수천㎞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비슷한 기술로 만든 유물을 곳곳에 남겼다. 신라의 황금보검, 누금세공 장식, 유리제품, 구리솥, 편두 머리 등 북방계라 칭하는 모든 유물과 풍습은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전체 유라시아는 물론 동유럽, 나아가서 서유럽까지도 널리 퍼져 있다. 이들 유물은 섞어놓으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니, 바로 훈족이 유라시아에 남긴 유산이다. 또한 훈족이 사용했던 강력한 마구, 갑옷, 화살 또한 동양과 서양의 무기 체계를 모두 바꾼 세계사적 변화였다. 훈족은 흉노에서 비롯한, 유라시아의 거대한 문화 네트워크였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들이 정복하는 초원 지역은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났고, 그 일파인 아틸라의 서진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2~4세기 로마와 동유럽 일대에서 널리 사용된 유리병. 신라 유물 중에도 비슷한 것이 발견된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강인욱 제공


유럽 역사 속의 동양인


훈족이 몽골인 계통이라는 생각은 아틸라를 직접 만났던 로마 교황청의 사신이며 역사가였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근거한다. 그는 아틸라가 무척 검소하며 전형적인 몽골인의 모습이었다고 묘사했다. 실제로 당시 유목사회에는 다양한 집단이 섞여 있으니 훈족에도 중국 북방에서 살던 몽골인종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틸라 1명에 대한 기록만으로 전체 훈족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당시 인골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이다. 아직 훈족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아틸라가 죽고 난 100년 뒤에 다시 동양에서 밀려온 아바르족에 관한 연구가 힌트를 준다. 아바르족은 5세기에 몽골을 중심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을 이루어 고구려와 연합했던 ‘유연’이라는 나라의 일파이다. 유연은 돌궐(튀르크)에 쫓겨서 서쪽으로 흘러갔고, 등자(발걸이)와 같은 고구려의 무기와 마구를 서양에 전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바르족은 오늘날의 헝가리에 정착해 빠르게 서양인에 동화했다. 동아시아에 관심 없었던 서양 학자들은 동쪽과의 관련성에 냉소적이었다. 그런데 약 20세기 중반에 시베리아 알타이 일대에서 고구려, 선비와 유사한 마구를 사용하던 유목 민족의 흔적이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아바르의 기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막연하기만 했던 아바르의 기원은 최근(2020년 1월) 헝가리 학자들에 의해 <네이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된 유전자 분석 결과로 실마리가 잡혔다. 이들은 아바르가 카르파티아 분지(현재의 헝가리 일대)에 정착하고 약 100년이 지난 뒤인 서기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남자들의 무덤에서 나온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국 북서부 및 신장 지역, 러시아 알타이 일대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가장 유사하다고 밝혀졌다. 고고학자들이 유물로 분석한 결과와 일치한 것이다. 이때는 아바르가 완전히 유럽에 정착한 지 한참 뒤로, 전체 아바르의 문화에서 동양의 흔적은 거의 찾기 어려운 상태였다.


훈족의 대이동 시대 동고트족이 남긴 황금 유물. 대영박물관 소장품. 강인욱 제공


동아시아 유전자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유목민들의 특성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철저한 부계사회를 유지했으며, 최상위 계급은 부계로 이어지는 혈연에 근거해서 유지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유목민은 최상위 무사 계급의 남성 혈통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아마 훈족도 비슷했을 것이다.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전체 유목민의 구성은 현지인들로 다양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가장 첨단의 군사와 문화를 선도하던 선우와 그들을 보좌하던 세력은 부계를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훈족 계통의 황금팔찌. 강인욱 제공


훈족, 그리고 동양에 대한 편견


동유럽에 등장한 훈이 중국에서 출발한 흉노와 같은 혈연의 민족인가라는 질문은 유목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처음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흉노족에서 훈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유라시아를 관통한 문화교류’에 있다. 그럼에도 서양 세력은 중세 이후 최근까지 아틸라에게 악마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북구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도 악인으로 등장한다. 최근까지도 ‘아틸라’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가 나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 대중 매체에서 폭군 또는 악마 같은 독재자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 아틸라에는 청나라 시절의 중국인 이미지가 덧대어진다. 시기별로 바뀌는 아틸라에 대한 그림을 보아도 처음엔 서양사람같이 묘사하다가 나중에 중국인처럼 바뀐다. 근대 이후 서양이 강조하던 ‘황화’(黃禍, Yellow peril)라는 동아시아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아틸라가 사용된 것이다. 한편, 소련의 경우 ‘훈=흉노’ 설을 다른 정치적인 관점에서 활용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련은 흉노와 훈족의 활동 무대인 유라시아 초원을 대부분 자신의 세력으로 통합했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합리화를 위하여 1930년대부터 ‘훈=흉노’라는 설을 이용한 것이다.


러시아 쿠르스크주에서 발견된 4세기 무렵 훈족의 황금 칼집과 장식.


현대의 관념이 투영된 ‘훈=흉노’ 설은 동양을 악으로 규정하는 황화로 이어지면서 지금도 동양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잠잠하던 서양 우월주의는 최근 동아시아의 발흥과 유럽의 경제침체에 따른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극우세력으로 부활하고 있다. 때마침 최근 중국에서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동양에 대한 해묵은 편견과 차별이 폭발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지금은 인종 간의 갈등을 촉발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버리고 공존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 동양에 대한 편견을 빚어낸 흉노와 훈족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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