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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당한 고구려의 국제성

[문명교류기행]

정수일 편집 2004.08.23(월) 15:14


△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절.(조우관을 쓴 두 사람)


대제국 고구려, 서역과 손잡고 수·당을 협공하다


역사에서 보면, 한 나라의 생존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즉 그 국제성에 크게 의존한다. 특히 역사의 격변기에는 그 의존도가 더욱 높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성은 국가의 권력행위에서 나타난다. 국제관계에서 권력행위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과 다른 나라로부터의 영향을 거부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국제성은 한 나라의 정체성이나 자주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


중국은 이러한 역사논리를 무시한 채 터무니 없는 강변으로 고구려를 예하의 ‘지방정권’으로 보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역사변조를 서슴치 않고 있다. 중국의 변조 ‘논리’대로라면, 고구려는 으늑한 변방 구석에서 아무런 국제성도 없이 ‘중원왕조’의 시중이나 드는 일개 지방군현에 불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허망한 가정임을 사실로 통박하고 있다. 사실로 끝나는 역사에는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고구려는 중국에 신속된 ‘지방정권’이 아니라, 번갈아 일어난 35개의 중국 왕조와 단기필마로 자웅을 겨루면서 700여년의 장수를 누린 강력한 국제적 실체로서의 주권국가였다. 1세기 태조왕대에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고 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이르러 국토를 크게 확대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전성기의 판도는 요동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한강 상류지역까지의 광활한 지역을 아우른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패자, 대제국이었다. 동서 6천리와 남북 4천리의 넓은 국토와 탄탄한 국가체제, 그리고 30만의 강군을 가진 고구려는 대제국답게 격변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의연한 자세로 능수능란한 외교정책과 전략전술에 의거해 독자적인 대외활동을 펴나갔다. 국제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대외활동이 없었던들 고구려는 그토록 장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먼나라와 사귀어 가까운 곳을 공격한’ 동북아 군사·외교 강국


고구려는 이웃 나라 중국과의 관계에서 당당한 권력행위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고구려는 생존 전 기간에 걸쳐 중국의 ‘중원왕조’뿐만 아니라, 서북방 초원지대의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과도 여러 겹의 다중적(多重的) 외교관계를 맺고 자신의 생존과 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중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3국과 5호 16국이라는 오랫동안의 분란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조시대를 맞는다. 그무렵 평양에 천도한 고구려의 맞상대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강대한 북위였다.


고구려는 시종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남조와 북방의 유연을 포섭하는 능숙한 외교정책으로 북위를 견제하였다. 표면상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자주 보내는 등 화친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북위의 동진에 제동을 걸었다. 북위는 연회의 입장순서나 저택 배정 같은 외국사절에 대한 위계대우에서 고구려 사절을 남조 버금가게 우대하였다. 이것은 북위인들이 말하 듯이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영향을 거부하는 능력’도 서슴없이 과시한다. 북위 조정이 장수왕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겠다는 정략혼인을 강요하자 고구려는 내정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북위의 청혼사절단을 억류하는 강경자세를 취한다. 주권국가로서의 고구려가 취한 정당한 권력행위이다.


△ 돌궐제국 시조의 장례식에 고구려가 조문단을 파견했다고 기록한 큘테긴비문


남조 포섭해 북위를 막고 돌궐·우즈베크와 교류

수·당을 물리쳤는데 어찌 ‘지방군현’일까


북위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도 자못 의젓하였다. 수나라는 건국 초부터 분별없이 고구려를 적대시했지만, 6백여년의 경륜을 쌓은 고구려 앞에서는 한낱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강온양면책으로 수나라를 길들였다. 4년간 해마다 사신을 보내 정세를 내탐하고 무기제조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는 병기를 확충하였다. 그런가 하면 염탐 목적으로 파견된 수문제의 사신을 연금까지 하여 침투를 사전에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영양왕은 선제책으로 말갈병 1만여명을 친솔하고 요서를 공략했다. 이에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전으로 대응해왔으나 전패를 당했고, 이어 있은 수양제 휘하의 113만 대군의 침입도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걸려 살수(청천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적장 우중문은 을지문덕이 보낸 그 유명한 오언시 네수에 그만 혼을 빼앗기고 퇴각하다가 참변을 당한다. 지장의 슬기는 나라를 위험에서 건져냈다. 네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전쟁은 중국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기 위한 ‘내전’이 아니라, 수의 완패로 판가름난 두 나라간의 국운을 건 한판 국제전쟁이었다.


고구려의 대수나라 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먼 곳과 사귀어서 가까운 곳을 공격’하는 현명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 영양왕은 7세기 초 돌궐과 공동으로 수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사신을 당시 오르도스(현 내몽고자치구 수원)에 있는 돌궐왕 계민가한(啓民可汗)에게 파견한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하면서 이 사실을 감지한 양제는 불쾌히 여겨 사신에게 돌아가 고구려 왕에게 입조의 예를 지키지 아니하면 돌궐과 함께 징벌하겠다는 것을 전하라고 하면서 위협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러한 공갈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입조를 끝내 거부하였다.


비록 수나라와 군신관계에 있는 계민의 적극적인 호응은 얻어내지 못하고, 또 일찍이 요동지역을 공격해 온 돌궐군을 격파해 1천여명을 살상한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는 6~7세기 동북아시아의 3대 세력의 하나로 부상한 돌궐과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관되게 화친정책을 모색해 왔다. 돌궐제국의 중심지였던 오르콘강(현 몽고공화국 경내) 주변의 호쇼차이담 분지에서 발견된 큘테긴비문(732년 건립)에는 제국의 시조 부믄카간의 장례식(553년)에 ‘동으로는 해뜨는 곳에서 뵈클리(Bokli)’가 조문단을 파견했다고 씌어져 있다. ‘뵈클리’에 관해 동서양 학계에서는 대체로 ‘B’는 ‘M’의 환치음이므로 ‘뵈클리’는 ‘뫼클리’, 즉 ‘맥구려(貊句麗)’로서 고구려를 지칭한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이것은 돌궐이 흥기할 때부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 전개될 국제질서의 전망을 미리 예단하고 북방세력과의 제휴를 목적으로 한 거시적 대외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는 증좌이다.


△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사절단 행렬 모사도. 동그라미 친 부분이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


고구려의 대당나라 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한 수나라는 결국 40년도 채 안되는 단명으로 존재를 마쳤다. 이어 구원을 품고 일어난 당나라는 2대 태종 때부터 분명하게 중앙과 지방간의 관계가 아닌, 나라와 나라간의 국제관계로 고구려에 대해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신을 보내 수대의 침략전쟁에서 전몰한 전사자들의 해골을 찾아 묻고, 고구려의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리는가 하면, 사신의 이름으로 정탐꾼들을 보내 고구려의 지세와 정세를 염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의 침략의도에 대비해 고구려는 16년간에 걸쳐 요하지방의 국경연변에 천리장성을 쌓고, 연개소문을 위시한 대당강경파들의 주도하에 당의 동진정책을 막아냈다. 이에 실망한 당태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해 고구려의 요새 안시성(安市城)을 연인원 50만명으로 60일간 포위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러 얼굴에 상처까지 입고 물러가고 말았다. 이역시 국운을 건 두 나라간의 한차례 국제전쟁이었다.


당으로부터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더해지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전대인 수대 때와 마찬가지로 다같이 인접한 중국으로부터의 위협 속에서 동병상린의 처지에 놓여 있는 서역제국과 연합하여 당을 동서로 협공할 이른바 ‘원교근공’ 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반영한 유물이 40년 전 중앙사이아의 한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1965년 우즈베크의 사마르칸드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터에서 발견된, 7세기 중엽(650~655년) 이곳을 통치하던 와르후만 왕을 진현하는 12명의 외국사절단 행렬도 벽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행렬의 마지막에 팔짱을 낀 채 조우관(鳥羽冠·깃털관)을 쓰고 둥근머리 큰칼을 찬 몽골인종계의 두 사람이 서 있다. 인종이나 복식, 그리고 유연과 돌궐을 비롯한 북방세력과의 유대를 줄곧 유지해 왔던 점 등을 감안할 때, 이 두 사람은 당으로부터의 압박으로 인해 국운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멀리 서역제국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북방 초원로를 타고 그곳에 사행한 고구려 사절로 추단된다. 역시 고구려의 국제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것이 700여년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으로서 국제성을 확보하고 있던 고구려의 정체이다. 그 어디에도 ‘중원왕조’에 오금이 박혀 기를 못펴는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당당한 권력행위의 주체로서 고구려가 누린 의젓한 위상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정수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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