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로 학생들 목을 친 국군 친일 장교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묻힌 기록되지 못한 민간인 학살 사건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입력 2012-02-11 20:54:11 l 수정 2012-02-12 12:07:08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1950년 이전 이승만 정권 시절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역사에서 지워지기는 마찬가지다. 

당대 사건을 목격한 이들 대다수는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 역시 과거의 기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권력을 되찾은 친일인사들은 이승만 정권이 세워지면서 소위 ‘빨갱이’를 처형했다. ‘빨갱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며 사회주의를 원했던 지식인들이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 중에는 사상과는 무관했던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되지 못한 역사는 경남지역의 곳곳에서도 몇몇 주민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밀양 표충사로 향하는 길목인 단장면에서는 “‘빨갱이’를 잡아 일본도로 목을 치고 거리에 효시했다는 주민 증언이 나온다. 단장면 단장천 너머 야산에는 학살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묻힌 곳으로 파악된다.

창원시 북면 마금산 온천과 접한 신목마을 야산에서도 ‘빨갱이’로 몰린 많은 민간인이 일본도에 의해 사지가 잘린 채 희생됐다. 주민의 말에 따르면 당시 마금산 온천에 주둔한 육군방첩대인 CIC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축창과 일본도로 학살했다. 창원 북면 신리 저수지 골자기와 신목 야산 2개 지점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곳으로 확인된다. 

하동군 민간인 학살
일본군 출신의 장교가 어린 학생을 일본도로 무참히 학살한 장소. 사진속 묘지가 있는 곳이다. ⓒ구자환 기자

노래 가사로 잘 알려진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를 인접한 야산에도 기록되지 못한 참담한 역사가 숨어있다. 

탑리마을 야산은 전라남도 광양시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을 잇는 남도대교를 마주한 곳으로, 현재 화개파출소 뒤편에 자리한 높지 않은 야산이다.

10일 만난 이 마을 강 모씨(76세)는 오랜 시간이 흐른 까닭에 정확한 연도는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14세의 나이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볼 때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을 일으킨 조선경비대 14연대가 여수에서 밀려나 백운산에서 머물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시점이다. 

여순 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인근 벌교, 보성, 고을, 광양, 구례, 곡성을 점령했으나, 4일 만에 진압군에 밀려 광양 및 인근 백운산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하동 인근으로 진출한 14연대 일부 군인들은 악양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도록 했다. 고등공민학교는 현재의 중학교 교육과정의 당시 교육기관이며, 악양 고등공민학교는 현재 악양 중학교다. 

토벌군에 의해 여수에서 밀려난 14연대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찰, 향토방위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섬진강을 넘지 못하고 지리산을 향해 이동했다. 곧이어 마을에는 국방경비대 9연대가 진입한다. 

강 노인은 어느 날 화장실에 있다가 뒷산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학살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집에서 불과 400미터에서 500미터 떨어진 거리다. 강 노인은 8명에서 10명 정도로 기억한다. 

“학생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칼로 목을 쳤어. 한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고 뭔가 이야기를 하다가 칼로 목을 치고, 다시 한 사람을 불러내 이야기를 하다가 목을 치고 그렇게...”

당시의 상황을 그동안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는 처참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흥분했다. 학생들의 목을 친 칼은 ‘닛폰도(일본도)’라고 했다. 

“그 중 한 사람을 살려서 내려왔는데, 사람 머리를 줄로 묶어 짊어지게 하고 데려왔다. 얼마나 힘들고 떨었는지, 사람 혓바닥이 소처럼 내려왔더라. 사람이 그런 모습은 내 처음 봤다.”

강 노인은 목이 잘린 사람들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집 인근을 거쳐 내려오는 군인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끔찍한 광경만을 뚜렷이 기억했다.

하동군 민간인 학살
하동군 화개면 탑리마을 야산 정상에 남아 있는 돌로 만든 참호. ⓒ구자환

화개면 탑리 야산 학도병 충혼탑
화개면 탑리 야산에 서 있는 한국전쟁 당시 출전한 학도병 충혼탑 ⓒ구자환 기자

강 노인은 일본도로 학생들의 목을 자른 이는 당시 아무개 대위라고 지목했다. 

일본군 소좌 출신으로 국방경비대 1기생으로 알려진 아무개 대위는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이 됐다. 가수이자 탤런트인 모 씨의 조부이기도 한 그는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민간인 학살과 달리 이 야산에 벌어진 인민군과 학도병의 전투 기록은 공식적으로 남아 있다. 

주민은 학도병들이 밥을 먹는 시간에 인민군 6사단이 포격을 했다고 말한다. 반면, 1950년 7월 25일 새벽 5시께 야산에 주둔한 학도병이 전차를 앞세우고 도로에 멈춘 인민군 6사단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M1 소총으로 무장한 학도병은 실탄사격 훈련조차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인민군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인민군 6사단에게 패퇴해 20~30여명 가량의 희생자를 남기고 하동 방향으로 후퇴했다. 

강 노인은 정확한 전투 일자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수와 순천에서 온 학도병으로 기억했다. 이 전투에서 희생된 학도병의 일부는 주먹밥을 움켜쥐고 숨졌다고도 했다. 이곳에서 희생된 학도병들은 임시매장 되었다가, 2007년 3월 국방부가 유해를 발굴하고 국립현충원으로 안장했다. 

하동군 화개면 탑리마을 또 다른 야산은 국민보도연맹원의 학살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학도병의 충혼탑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산 정상에는 순천사건 때 만들었다는 참호 몇 개가 이끼가 낀 채 옛 모습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구자환 기자hanhit@vop.co.kr


답 : 서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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