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512290048256914


봉황산성

[한문화 원류 기행 11]

입력 1995.12.29 


고구려의 최대성 요동정벌 교두보

단동 북서쪽 위치 둘레 15㎞… 옛 문헌엔 오골성 기록

험산에 둘러싸여 지금도 중국군 군수기지로 활용돼


신의주가 손에 잡힐 듯한 단둥(단동)에서 발길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압록강 건너 신의주는 갈 수 없는 「우리땅」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다시 돌렸다. 단둥에서 북서쪽으로 40km 가량 거슬러 올라가 봉황산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북녘땅을 밟지 못한 슬픔에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역사의 이끼를 이고 당당하게 서 있는 봉황산성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옛 자료에 오골성으로 기록돼 있는 이 산성은 중국땅에 분포돼 있는 고구려산성중 최대규모로 둘레가 무려 15㎞에 이른다. 동·서쪽에 가파른 바위산인 봉황산과 고려성자산이 마주보며 서 있고 그 주위로 험준한 봉우리들이 타원형으로 둘러쳐진 지세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은 이곳을 지나면서 『멀리 봉황산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 하며, 연꽃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여름구름의 기이한 형태나 아름다운 자태처럼 무어라 형용키 어렵다』며 『기이함과 뾰족함이 도봉산, 삼각산보다 낫다』고 평한 바 있다.


압록강 이북의 성중에서 평양성으로 이르는 길목에 자리잡은 이 산성은 위치나 규모로 보아 요동지역을 관장하는 고구려의 핵심기지였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군이 백암성을 공격할 때 오골성에서 병사를 출동시켜 성을 지원했다」거나 「648년 당나라가 병사를 진격시켜 박작성을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으로 하여금 병사 3만여명을 이끌고 가 지원토록 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이 전략적 요충지로서 봉황산성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삼국사기에도 당에 투항한 고구려장군들이 오골성을 치면 그 밖의 작은 성들은 자연히 무너질 것이라고 진언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남문 부근에는 중국군의 각종 물자와 무기들이 보관된 대규모 군수기지가 들어서 있다. 기지의 담을 따라 걸어 오르다 보니 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는데 다행히 산행길을 막지는 않았다. 천수백년전 중국대륙을 겨냥한 요새가 이제는 반대로 한반도를 향한 주요 군사기지로 활용되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남문을 지나자 마자 왼쪽 비탈진 곳에 10m여 높이의 바위산이 나타난다. 연개소문의 엉덩이자국과 그의 애마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현장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바위산의 이 자국들이 당의 명장 설인귀가 고구려정복에 나서면서 10여리 밖에서 쏜 화살에 맞아 뚫린 구멍이라는 전설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북문을 향해 옥수수밭 사이의 길을 따라 20분쯤 걸어가니 30여호의 농가가 모여 있고 거기서 1시간쯤 야산을 오르자 성터가 눈에 들어온다. 고개마루의 북문은 흔적도 없었지만 오솔길 양편에 당당하게 서 있는 성벽이 지난날의 위용을 대신해준다. 가장 높은 성벽은 15m에 달했다고 기록은 전해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높이 6∼8m, 폭 2m가량의 성벽은 옛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성벽아래 산에서는 누에를 방목해서 치고 있다. 여름의 울창한 숲이 가을처럼 보일만큼 참나무잎마다 노란 누에가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치는 누에가 단둥 전체의 70%, 중국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한 중국인 청년은 『할아버지대부터 이 마을에서 누에를 치며 살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홍수피해도 없어 다른 농사도 잘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북쪽산 기슭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이 모여 있고, 마을 아래의 역이름은 탕하역으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고려문역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말발굽아래 놓였던 만주대륙은 만주족자치현으로 변했으나 여기에 뿌리박고 사는 고구려 후예들에게는 변함없는 고향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최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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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성 위치·명칭 논란

조선 실학자­“옛 도읍 안시성이 봉황산성”

중국학자들­“안시성은 지금의 개현 부근”

고구려 수도 4∼5번 옮겨 혼란 유발


봉황산성의 명칭과 위치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논란이 많았다.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가장 컸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이익 등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봉황산성이 곧 안시성이라고 주장했다.


북한학자들도 안시성이 한때 고구려 수도였으며 환도·안시성은 봉황산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안시성은 옛날 안시홀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왕력의 「임인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다.


북한학자들은 이에 더 나아가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친 곳도 평양성이 아니라 봉황산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대부분 안시성을 현재의 개현부근으로 보고 있다. 연암 박지원도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한 당의 「지지」를 근거로 개현을 안시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길수 서경대교수는 『평양이라는 지명이 여러 군데서 사용되고 또 고구려가 수도를 4∼5번 옮김으로써 혼란을 유발한 것같다』며 『지명에 대해 한국과 중국학자들의 정밀한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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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이 자리잡은 봉황산과 고려성자산의 기묘한 바위형상은 서울의 북한산을 떠올리게 했다. 직각으로 뻗어 올라간 절벽이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면 듬성듬성 자라는 푸른 소나무들은 긴장감을 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적이 침입하기 쉬운 지역만을 골라 쌓은 성벽은 북쪽에만 남아 있었는데 멀리서도 보일 만큼 높고 견고했다. 주로 정방형의 돌을 쌓아 올리기도 했지만 뾰족한 돌을 모아 축조한 곳도 있었다. 성위에 올라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드러난 성벽과 뒤편의 암벽을 화면에 담는 동안 고구려의 저력과 기상을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 음영일

▲45년 서울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5회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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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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