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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교통 당의 영향 아래 정치·경제 발전

2003-03-09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발해의 건국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한반도 평양이남 땅을 통일하여 영토를 넓히고 당나라는 평양이북 고구려 땅인 만주 전지역을 점령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의 넓은 땅을 통합하려다가 역부족을 느꼈다. 나라를 빼앗긴 고구려의 유민들이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다 접경하고 있는 말갈족의 방해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이를 평정하고 점령한 고구려 땅을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의 왕족들과 말갈족을 포섭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틈을 타고 고구려의 왕족으로서 나라 잃은 유민이 되었던 대조영(大祚榮)이 말갈족을 포섭하고 세력을 키워 고구려 땅 중앙 깊숙이 있는 동모산(길림성의 동경성 근방)으로 들어가 서기 698년 발해(渤海)국을 세웠다. 그러자 당나라는 대조영의 세력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당나라 속국으로 삼기 위해 대조영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발해는 건국 후 초기에는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보다 친화정책을 택해 고구려와 당나라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정치, 경제적으로 당의 속국 형태로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고구려 땅을 되찾은 발해는 한창 전성기인 9세기에 와서 고구려의 국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했다. 이렇게 하여 10대 선왕(813∼830) 때는 국토가 최대로 확장되어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 동으로는 연해주(동해의 시호테이아린산맥)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용흥강(함남의 영흥) 서로는 개원형(개원)에 이르렀다. 해동성국(海東盛國) 3대 문왕 (대흠무)은 수도를 동모산에서 용천부의 상경으로 옮기고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용천부의 상경을 중심으로 전국의 동서남북에 용원부의 동경(동쪽의 훈춘), 남해부의 남경(함흥), 압록강의 서경(압록강 상류 중강진 근처), 현덕부(길림성의 포화)의 중경 등 5대 도시와 신라로 가는 신라도,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거란도, 당으로 가는 육로인 영주도,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 당나라 왕에게 조공하는 길인 조공도의 5대간선 국도를 건설했다.


이렇게 번성했던 발해는 수많은 도시와 건축물 등 국가 건설에 막대한 재력을 쏟아부었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에 들어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진데다가 귀족들의 부패가 심해 국운이 쇠퇴할 무렵 거란국의 왕 아율아보기가 1만 명의 거란군을 이끌고 상경을 함락해, 발해는 15대 왕조 229년만인 서기 92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의 경제


위도상 북위 42。 이북에 있는 발해는 한대성 기후조건을 갖고 있어 목축업이 발달했고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 농업도 꽤 번성했다. 발해의 성터나 주거지 또는 무덤에서 각종 철제 농기구와 마구들이 출토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발해는 국토 절반 이상이 철·동·금·은·납 등이 매상된 산악지대라서 제련업과 철을 이용한 수공업도 발달했다. 따라서 철광석 무역도 성행했는데 도로와 수레가 발달해 이웃 당나라 거란까지 수출이 가능했다. 제련업이 발달했음은 유적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풀무화덕과 용광로가 증명하고 있으며, 그밖에 유구와 쇠동구덩이, 선철조각, 주물용 집게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발해는 풍부하게 매장된 광물을 제련하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고 이를 위해 국가에서 야금기술자를 양성했다.


풍부한 철·동·금·은 등 광물을 소재로 제련업이 발전하면서 이들 금속을 이용한 수공업도 발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돈화·화룡·영안 등 만주에 있는 발해의 유적지에서 각종 철제 농기구·무기·철제 장신구·마구 되는 등 다양한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발해가 바다를 통해 당나라나 일본과 정치나 묘역을 위해 빈번한 왕래를 했던 것을 보면 조선업도 상당히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유신들로 구성된 나라여서, 고구려로부터 전수 받은 조선술과 당과의 해상교역으로 받아들인 당나라 조선술 등을 잘 융합해 발해 고유의 조선업을 발달시켰던 것이다.


5대 간선도로


발해는 당나라·일본·신라와 정치적 교류, 문물교역을 원활히 해 경제적 기반을 굳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구하기 위해 건국 초기부터 교통로를 개척 발달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 각 지방행정구역을 통치하고 수공업제품과 농산품, 그리고 철·금·은·동 등 철광 인마가 다닐 수 있는 도로망도 건설했다.


발해의 첫 도로는 <구당서> 중 ‘말갈서’에 말갈시대 장군인 이근행이 발해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교역·문화교류·사절교류를 위해 만든 석도(石道)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시작으로 발해는 당나라와 무역·경제·정치·문화·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전국에 5대 간선도로인 조공도·신라도·거란도·영주도, 일본도를 건설했다.


조공도


발해의 3경인 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으로부터 압록강과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연대 근방)로 상륙해 육로를 통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이처럼 조공도는 육로와 해로를 거치게 되어 있다. 육로는 수도인 상경을 출발해 돈화·대포채화를 지나 무송을 거쳐 압록강의 임강진 근방에 있는 신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 다른 육로는 상경을 출발해 오아청가야 하류를 지나 연길·용정을 거쳐 중경 화룡의 서고성을 통과해 압록강 압록부의 서경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한 용원부의 동경(훈춘)에서 당나라로 가려면 두만강을 타고 남강산맥을 넘어 부르하통하를 따라 연길과 용정을 지나 현덕부의 중경을 거처 안도·대포채하·무송을 통과, 압록부의 서경으로 갔다. 서경에서 당으로 길 때는 뱃길을 이용했다. 서경(중강진 근처)에서 강선을 타고 압록강으로 내려가 환주(지금의 집안)를 거쳐 압록강어귀인 박장구로 나와 돛 달린 해선으로 갈아타고 요동반도 해안을 따라 오골강(애하) 어귀를 지나 석인왕(석성도)와 행화포·도화초(대련)·여순을 거친 다음 오해호(발해만)를 건너 산동반도 북쪽 연안의 대사도(묘도열도)를 지나 등주로 상륙한 후 육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이다. 이 해로는 발해 제일의 간선교통로였다.


조공도가 개통된 정확한 시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 초기로 추정된다. 즉 발해 5대 교통로 중 제일 먼저 개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 건국이 당나라와 밀접한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 앙의특사인 홍영경과 최흔이 발해로 파견되어 대조영을 발해의 왕으로 정식 책봉한 2년 후인 서기 714년, 이 두 사람이 발해에서 당나라로 귀국하던 길에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에 있던 황금산 기슭에다 조공도를 기념하는 우물 두 곳을 파고 조공도의 위치와 거리 그리고 경유지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후대에 와서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라도


발해의 4대 도시인 상경·동경·서경·중경에서 남경(함경도 부청근방)으로 가 신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발해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남경을 통과해야 했다. <삼국사기>와 당나라 사기인 <고금군국지>에는 ‘남경(부청 근방)은 니하(용훈강)를 경계로 신라와 접했고, 신라의 정천부(함남의 덕원)에서 책성부(훈춘)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5대 교통로를 만들면서 각 도로마다 일정한 간격에 역을 두고 오가는 관리와 사람들의 여행을 돕도록 역로 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신라도 중에 동경용원부가 있는 훈춘에서 발해의 남경 남해부와 접경하고 있는 신라의 접천부 덕원 사이 길에는 30회마다 1개 역씩 모두 39개 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두 도시를 연결하는 육로는 1천17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영주도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당나라의 영주로 가는 육로다. 현재 중국 요녕성에 있는 모양을 당나라시대에는 영주로 불렀는데 이곳에는 발해국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당나라 조정을 대표하는 평로절도사(총독)가 주재했다. 발해국에 대한 당나라 왕의 명령이 영주의 평로절도사에게 전달되면 영주도를 통해 발해에 전달되거나 영주의 당나라 관리들이 발해로 들어갔다.


이 영주도는 당나라와 발해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정치도로의 성격을 띠었다. 영주도는 상경에서 중경(현덕부)을 거처 현덕부의 중경(돈화)를 거처 화전·휘남·해남·신성(무순)·심양·흑산·북진을 통과해 영주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당나라 수도 장안(서안)으로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상과 같은 육로로 발해와 영주간을 오갔으나 거란과 돌궐족 때문에 영주도가 자주 차단되어 후기에 들어와서는 압록강을 거치는 해로인 조공도를 이용했다.


거란도


발해에서 서쪽 거란국으로 가는 육로이다. 부여국(농안)은 거란과 접경지역에 있어 거란국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부여를 통과해야갈 수 있었다. 발해의 상경에서 출발해 장광재 고개를 지나 국경의 부여부를 통과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 거란국의 수도인 임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일본도


발해의 상경·중경·서경·남경에서 용원부의 동경(훈춘)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길인데 이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 두 길을 지나야 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용원부의 동경(훈춘)이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발해 내륙의 어느 곳에서나 일본에 가기 위해 배를 타려면 필히 동경으로 가야 했는데, 발해 전기(698∼755)에는 발해 내륙에서 화룡과 연길을 통해 동경으로, 후기(755∼926)에는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왕청과 도문을 통해 동경으로 들어갔다.


동경에서 일본으로 가는 뱃길도 전·후기가 다르다. 발해 전기에는 동경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타고 내려와 현재의 크라스키노인 모구위(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 중부 연안의 후쿠이·이나이시가와로 상륙하는 직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이 직항로는 험한 편이어서 표류가 잦았다. 따라서 후기 때는 계절풍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쉬운 남행항로를 개척해 이용했다. 바로 훈춘에서 염주(크라그티노)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한반도 해안으로 내려와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난 후 일보의 북규슈에 도착하는 ‘규슈항로’였다.


‘왕의 길’ 주작대로와 역로제도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제3대 문왕(대흠무)이 초기의 수도였던 동모산에서 옮겨 건설한 도시로서 발해국이 존재했던 229년 동안 가장 오랫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 상경의 규격과 형태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도시를 외성으로 두르고 그 안에 내성인 궁성과 왕성을 만들어 궁궐과 관청 건물을 건축했다.


상경용천부는 외성과 궁성, 왕성의 3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6.3km고 성벽 높이는 2∼3m인데 외성벽 밖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문은 동서에 각 2개, 남북에 각 3개 등 10개가 설치되었고 동서와 남북의 문은 대칭으로 세워졌다.


성안에는 장기판 모양의 도로 11개가 나 있고 이 길은 10개의 문과 이어져 있다. 연결된 5개의 길은 성의 중심 도로 구실을 했다. 이밖에 동서를 연결하는 3개의 큰집과 성벽안을 따라 만든 1개의 순환도로가 있었다.


성안 북쪽에 있는, 왕국과 남쪽의 중앙문을 연결하는 가장 큰 도로를 주작대로(朱雀大路)라 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2구역으로 나눠 중앙통치기구인 각 관청건물을 배치,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장방형 도시를 이루었다. 주작대로의 유적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어 당시 상경성의 웅장함을 엿보게 한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있던 주작대로를 모방한 것으로 너비는 110cm다.


상경성의 도로구조는 모래와 돌을 섞어 탄탄하게 다져 만든 사석도로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왕승례, 이전복과 손옥량은 흙을 다져 만든 흙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수레를 많이 사용한 상경성 도로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면 비가 왔을 때 진흙탕이 되어 무거운 쇠태 바퀴를 단 수레의 운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한 흙은 모래와 돌로 보는 것이 옳다. 사석도로임이 증명된 것은 1990년이다. 성의 복원작업 중 5개의 도로 가운데 한 곳을 1천 건 가량 팠을 때 깊이 30cm∼2m 사이에서 돌덩이가 섞인 모래층이 나온 것. 이밖에 주작대로와 성의 남문에서 목단강을 연결하는 길도 사석도로였다. 모래를 깐 위에 20∼30cm 직경의 돌을 얹었다. 1층 또는 2층으로 깐 돌 사이에는 모래를 넣어 다졌다.


1989년 흑룡강성의 고고학 연구소가 상경성내 궁성의 관사터를 발굴했을 때 너비 15m의 사석도로가 발견되었는데, 이 도로에는 80∼85cm 너비의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로써 발해 수레의 규격과 함께 발해가 수레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발해는 국내 도로뿐만 아니라 멀리 중앙아시아와도 교역하기 위해 국제 교통로인 ‘담비길’을 뚫었다. 고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민족 중 하나로 러시아 우즈베르 지역에 살던 소그드인들과 발해인들이 7세기 초부터 아무르강-우수리강의 수로와 육로를 통해 주로 담비를 교역했다고 하여 발해사 전문 러시아사학자인 사브크노프 교수는 이 길을 ‘담비길’이라 부른다.


발해는 당나라의 교통관리제도를 그대로 모방해 5대 국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에 역로제도를 실시했다. 당나라 가담이 쓴 <고금군국지>에는 책성(훈춘)과 신라의 정철(원산 근방)사이 교통로에 39개 역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는 이 기록대로 전국 간선도로 30리마다 역참을 설치해 왕명이나 조정의 업무를 지방통치자나 외국에 전달하는 관원·사신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수레·역마·배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서기 833년에는 말이나 수레 등 탈것을 빌려주는 일종의 환승제도인 체승제도를 시행했다. 발해와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 관현, 당나라 유학생의 교통에 도움을 주기 위해 당나라를 여행할 때는 당의 역참에서, 발해의 조공도를 따라 여행할 때는 발해의 역참에서 말이나 수레를 빌리고 또 새것으로 바꾸어 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고금군국지>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했던 발해 유학생들을 체승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모산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발해 땅


첫 도읍지인 동모산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 상경성

수도 상경성의 반듯하게 구획된 시가지와 바둑판 모양의 도로

발해를 부흥시켰던 5대 국도


상경성 주작대로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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