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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이 ‘43광수’로 지목한 청년…5·18폄훼 증거가 바로 접니다

등록 :2020-02-25 05:00 수정 :2020-02-25 07:30


[5·18민주화운동 40돌 기획-오월, 그날 그 사람들] ②시민군 총기수거반 최영규씨


계엄군 발포로 시민들 숨지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대학생

적개심에 소총 들고 무장 시작 “기자가 역사 증거로 쓴다고 해, 금남로 돌던 트럭서 사진 찍어”

지만원 사진 속 날 북한군 지목, 5·18에 무심했던 과거 부끄러워

명예훼손 피해자로 고소할 계획 “불의에 항거했던 그 날의 정신, 젊은 세대가 지켜주리라 믿어”


1980년 5월22일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최영규(당시 21살)씨.다큐멘터리 <김군> 갈무리


앳된 모습의 한 청년이 카빈 소총과 가스탄을 들고 트럭 짐칸에 앉아 있다.


“(1980년) 5월22일로 기억나요. 트럭 타고 금남로를 순회하는데 중앙일보 기자라고 밝힌 사람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저지했죠. ‘지금이 아니고 나중에 역사의 증거로 사용할 것’이라는 설명에 사진 찍는 것을 허용했어요.”


지난 19일 대전에서 만난 최영규씨는 40년 전 일을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했다. 어둠 속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아침 길거리에 널브러진 주검, 병원 영안실에 가득했던 피에 젖은 하얀 천 등 그때의 참상이 가끔 꿈에 나온다고 했다. 80년 5월, 그는 21살이었다.


1980년 5월22일 최영규(붉은 원)씨가 시민군 트럭을 타고 광주 시가지를 살펴보고 있다.다큐멘터리 <김군> 갈무리


전남 구례가 고향인 그는 교직 생활을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당시 2학년)이었다. 광주의 한 대학을 다니며 남구 백운동 할머니 집에서 누나와 함께 지냈다. 일요일이었던 5월18일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 큰 시위가 열렸고 계엄군들이 집집마다 수색해서 젊은이들을 마구 때리고 끌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튿날이 되자 사람들은 산발적으로 모여 ‘전두환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재빨리 흩어지는 게릴라 시위를 하고 있었다. “20일 아침에 집 앞 도로가 시끄러워 나가보았더니 차를 탄 사람들이 도청으로 가자고 외치고 있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가만있을 수 없었죠.”


5·18 민주화운동으로부터 40년이 지난 2020년 2월13일 시민군 출신 최영규씨가 나주 5·18 민중항쟁 기념비석 옆에 서 있다. 지만원 등 극우세력은 최씨를 북한군 고위간부 우동측으로 지목했지만 최씨는 현재 대전에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최씨의 활동은 처음엔 단순했다. 지프를 타고 옛 전남도청∼광주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두환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고 시위에 참여하라고 독려하기를 반복했다. 가끔 시장 아주머니들이 올려다 주는 주먹밥은 든든한 요깃거리였다.


최씨는 21일 오전 장갑차를 탔다. 전날 밤 광주역 앞에서 집단 발포로 시민이 희생되자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 공장(현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끌고 나온 차였다. 이날 오전 시위대는 장갑차 3대를 앞세우고 계엄군이 방호하고 있는 옛 전남도청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최씨는 장갑차 뒷자리에 앉아 손바닥만한 방탄유리창 너머로 바깥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최씨가 탄 장갑차는 빠른 속도로 후진해 광주역 앞으로 피했다. 장갑차에서 내려 둘러봤다. 옆 장갑차 위에 한 청년이 숨져 있었다. 태극기 휘두르던 그이의 피가 장갑차를 적셨다. “붉은 피를 보니 공포심과 적개심이 동시에 들더군요.”


1980년 5월22일 최영규(붉은 원)씨가 시민군 트럭을 탄 채 광주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다큐멘터리 <김군> 갈무리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장갑차 위에 올라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으니 우리도 총을 듭시다”라고 외쳤다. 최씨를 포함한 수십명은 버스를 타고 광주연초제조창 지하무기고에서 예비군용 카빈 소총 수백정을 꺼내 왔다. 연초제조창에서 실탄을 찾지 못하자 일부 시민군은 화순탄광에서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왔다.


그는 어느새 무장한 시민군이 됐다. 21일 오후가 되자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광주시민들은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 치안을 유지했다. 최씨는 총기수거반 임무를 맡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시민들에게 총기를 반납하도록 촉구했다.


21일 밤 최씨는 광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방림동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시민군 동료 10여명과 밤새 야경을 섰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고 총알 불빛이 보였다. 최씨는 무서운 마음에 허공을 향해 총을 쐈다. 이튿날 새벽, 도로에는 계엄군이 쏜 총에 맞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최씨는 동료들과 함께 숨진 시민을 양림동 기독병원으로 옮겼다. 영안실에는 이미 주검 수십구가 누워 있었다. 창백한 피부의 단발머리 여학생과 머리의 3분의 2가 날아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남성도 있었다.


1980년 5월21일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금남로에 모여 있다. 옛 기무사령부 사진첩


5월24일께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군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언론사를 단죄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광주엠비시(MBC)와 광주케이비에스(KBS) 건물이 불에 탄 뒤였다. 시민군은 전일빌딩으로 몰려갔다. 옛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사옥이었던 이 건물에는 전일방송, 통신사 합동통신 등 다수 언론사가 있었다. 일부 시민군은 화순에서 가져온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건물을 폭파하자고 주장했다. 광주를 상징하는 건물이니 파괴하면 안 된다는 만류에 폭파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날 최씨는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소리에 동료들과 광주 서방시장 쪽 언덕에 올라 3공수여단이 주둔한 광주교도소 쪽으로 총을 쏘기도 했다.


5월25일, 옷이 너무 더러워진데다 피곤이 밀려와 잠시 백운동 집에 들렀다. 아버지가 와 있었다. 최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구례에서 버스를 타고 담양에 도착해 걸어서 아들이 사는 백운동 집을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따라와라. 가자”고 말했다.


거역할 수 없던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던 도로를 피해 논길로 화순까지 걸어갔다. 화순에서 간신히 순천 가는 버스를 탔지만 사복경찰관들이 와서 최씨를 끌어 내리려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버텼고 다른 승객들도 경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승객들의 기세에 밀린 경찰이 버스에서 내리며 무사히 순천을 거쳐 구례 집에 갈 수 있었다.


1979년 대학에 갓 입학한 최영규(맨 왼쪽)씨가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최씨는 1년 뒤 5·18 민주화운동 한복판에 서게 된다. 최영규씨 제공


27일 오전 텔레비전에서 계엄군이 진압한 광주를 봤다. 방송에선 사망자가 열몇명이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만 살았다는 부끄러움과 안도감,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등 복잡한 마음이었다.


5·18은 결코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1981년 4월 입대한 최씨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 9기갑학교 조교로 차출됐다. 1년 전 광주를 진압했던 탱크와 장갑차가 있는 곳이었다. 당시 진압에 투입됐던 선임들은 최씨가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구타를 했다. “너 데모했지?” 참나무 몽둥이로 배를 때려 갈비뼈가 부러졌다.


29살 때 대전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처가에 처음 인사를 갔던 날 장인어른은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씨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1988년 교직 생활을 시작한 최영규씨가 처음 부임했을 때 학생들과 찍은 사진. 최영규씨 제공


최씨는 5·18을 가슴에 묻으려고 했다. 전라도 사람에 대한 차별, 혹시나 모를 신분상의 불이익에 대한 우려, 항쟁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5·18에 대해 떠드는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30년간 영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한번도 5·18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세상은 40년 전 광주시민들이 바라던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며 민주주의의 틀이 잡혔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국민은 촛불을 들고 불의에 항거했다.


“직업상 촛불항쟁에는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멀리서 응원했어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1980년 5월 광주는 총을 들었지만 2016년엔 촛불을 들었다는 점에서 건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거죠.”


최영규씨의 결혼식 사진. 최씨는 대전에서 교직 생활 중 아내 송은주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최영규씨 제공


그가 5·18로 다시 돌아온 것은 ‘광수’ 때문이었다. 지난해 9월 최씨는 북한특수군으로 지목된 5·18 시민군의 행적을 쫓는 다큐멘터리 <김군>에 자신이 나왔다는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지만원씨가 자신을 제43광수(80년 5월 광주에 파견된 북한특수군이라는 의미)라며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우동측이라고 지목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5·18에 그토록 무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5·18 역사 왜곡 반대 투쟁의 한복판으로 나섰다. 그는 3월 5·18기념재단이 지만원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추가 고소할 때 피해자로 이름을 올릴 계획이다. 앞서 5·18기념재단은 시민군 15명을 북한군이라고 주장한 지만원씨를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네차례에 걸쳐 고소했고 지씨는 결국 이달 13일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최씨는 이를 계기로 5·18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며 왜곡에 대응할 예정이다.


최영규씨가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40년간 최씨에게 5·18은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할 만큼 아픈 기억이었다. 최영규씨 제공


“문재인 정권 들어 5·18 진상규명이 시작되고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지자 자부심이 생겼어요. 40년 만에 정체성이 확립된 거죠.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민주투사 한분 한분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합니다.”


최씨는 5·18을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 청년 세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외세 침략을 자주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일반 백성들이 나서 국난을 극복했죠. 이런 정신이 5·18과 촛불항쟁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최근 일부 젊은이들이 5·18을 폄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이들도 역사의 진실에 수긍할 것이라고 봅니다. 선조들처럼 젊은 세대들도 대한민국 정신을 지켜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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