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124150305013


려수전쟁 총결산

[고구려사 명장면 63] 

임기환 입력 2019.01.24. 15:03 


요동성에 대한 총공세를 눈앞에 두고, 양현감의 반란으로 부득이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수양제는 반란을 진압한 뒤 이듬해 614년 2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고구려 정벌을 의논케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눈치만 볼 뿐 감히 이를 만류하는 용기를 갖고 있는 자가 없었다. 연거푸 2년 동안 고구려를 정벌의 욕망을 접지 못하고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는 지경이라면 거의 정신병적인 집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그러니 누가 감히 수양제 앞에서 고구려 정벌을 비판하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3월에 탁군에 도착한 양제는 다시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탁군에서 임유관을 거쳐 7월에 수양제는 최전방 군수기지인 회원진(懷遠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 동원 시스템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착하지 못한 자가 수두룩했다. 그러하니 수양제도 아무리 마음이 급하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회원진에 머물며 군사 동원만 재촉할 뿐이었다.


다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출전한 내호아(來護兒)만이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비사성(卑奢城)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 육로군이 요하를 건너지도 못한 상황에서 수군 단독으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수양제 진영에 영양왕이 보낸 고구려 사신이 도착하였다. 곧 수의 조정에 가서 영양왕이 항복한다는 뜻을 전하는 사신이었다. 그리고 2차 원정 때 양현감의 반란에 연루될까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한 곡사정도 함께 송환했다. 고구려는 수양제로 하여금 군대를 돌이킬 수 있는 명분을 근사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내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수양제는 얼른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받아들였다. 영양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서둘러 군사를 돌이켰다. 그나마 작은 전공이라도 거둔 내호아의 군대도 불러들였다. 1차 원정 때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했던 내호아는 모처럼의 승리가 물거품이 되자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대군이 세 번이나 출정하였으나 적을 평정하지 못했다. 이번에 군사를 돌이키면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니 그동안 힘을 쓰고도 이룬 바가 없어 수치스러울 뿐이다. 지금 고구려가 어려운 처지이니 많은 병사로 공격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길 것이다."


이 말을 보면 고구려 역시 계속되는 전쟁에 지치기도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기껏 변방의 성 하나를 공격하여 승리한 기세로 큰 소리 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수나라 군대가 얼마나 승리에 목말라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수양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양왕이 만들어준 회군의 명분으로 고구려의 항복 문서를 받고 마치 개선군처럼 돌아온 수양제는 이번 원정이 성공하였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곡사정을 대묘(大廟)에 바친 다음 처형하였다.


그러나 입조하여 항복하겠다던 영양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 고구려의 항복이라는게 일종의 외교 전략이었으며, 세 차례 수양제 군대를 상대해본 결과 또 수양제가 군대를 동원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또 다른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외교적 언사가 효과를 보게 된 것은 앞서 수의 군대를 무력화시켰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힘을 갖지 못한 외교적 언사는 단지 허언일 뿐이다.


수양제는 결국 세 번에 걸쳐 고구려 정벌군을 동원하였는데 113만이 넘는 군대를 거느렸던 1차 원정 때에는 요동성과 평양에서, 살수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30만 군대를 동원한 2차 원정에서는 후방의 반란으로 실패하였다. 그런데 3차 원정은 군사 동원도 뜻대로 되지 않아 요하를 건너지도 못했고, 수나라 국내 사정은 2차 원정 못지않게 불안정한 상황이었는데 고구려는 그런 상황을 역이용하여 철군의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결국 수양제는 가장 취약한 군사력을 갖고 오히려 고구려왕의 항복이라는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이는 이미 려·수 전쟁의 주도권을 고구려가 갖고 있음을 뜻한다.


영양왕의 입조가 이루어지지 않자 수양제는 615년 10월 고구려 원정을 꺼내들었으나 군신의 반대가 심해 결국 수 멸망 때까지 다시 실행되지는 못했다. 고구려 원정에 이제는 수양제의 최측근까지도 결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수나라 국내 사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듭되는 고구려 원정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가 이어지자 주변 국가 입장에서 볼 때 이제는 수양제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천하를 통일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양제 위세가 이미 땅에 떨어졌다.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집착했던 이유도 자기 위신이 고구려 원정에서 추락했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를 굴복시킴으로써 되찾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돌궐이 세력을 회복하여 수를 위협하고 있었다. 예컨대 615년 8월 수양제는 북방 순수길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군대를 동원하여 수양제를 추격하여 9월에 안문(지금의 산서성 대현)에서 수양제를 포위하였다. 급박한 순간에 시필가한의 부인인 의성공주가 꾀를 내어 돌궐군을 철수시켜 겨우 곤경을 면하였다. 의성공주는 수양제의 누이로서 동돌궐에 시집가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 후일 수양제가 살해되고 수왕조가 멸망한 뒤에도 수 황실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 인물이었다.


수양제릉 : 고구려 정벌의 실패만 없었더라면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명군(名君)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어도, 중원을 통일하고 돌궐과 서역을 거느려 최초로 천하를 제패한 군주라는 명성은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명을 단축시키고 왕조를 멸망케 하였으며 역사상 가장 포악한 군주라는 오명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 안문성에 돌궐군에 포위되어 위기를 맞은 순간에 수양제 신료들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폐하께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고구려 정벌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시면 군사들이 모두 사기가 올라 분투하여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이 예화는 수나라 조정과 군사들 사이에 고구려 정벌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양제 백만 대군의 패배는 당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고구려 정벌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후일 당태종도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하들과 장안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주변 어느 나라도 고구려가 수의 엄청난 대군을 패퇴시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거듭되는 승리로 귀결되자 더 이상 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라는 이름이 강렬하게 주변국에 회자되었다.


고구려는 국경에 수나라 전사자 유해를 쌓아 경관(京觀)을 지었다. 고구려의 승리를 과시하는 기념물이었다. 후일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기에 앞서 이 경관부터 파괴하였다. 이 경관이 주변국에 어떤 상징적 이미지를 주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618년에는 왜(倭)에 사절을 보내 수양제의 대군을 격파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때 잡은 포로와 악기, 무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려·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외교적 과시였다. 아마도 왜는 고구려의 국력과 군사력에 대해 다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수양제의 원정 이전에는 고구려 정벌을 촉구하는 사신을 수양제에 보내기도 하였는데, 후일 고구려와 손을 잡게 되는 외교정책을 취하게 된 것도 려·수 전쟁 승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수나라에서도 얻은 바가 결코 적지 않다. 수나라는 4차에 걸쳐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는데, 원정이 거듭되면서 전쟁 자체를 치르는 무기 체계나 공성술, 출정 시기나 공격 루트 등이 개선되고 다양해졌다. 결과는 실패했지만, 고구려를 공략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과 전술을 축적할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이 후일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시에 유효하게 활용되었다.


여러 차례 대규모로 치른 려·수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수나라 당사국뿐만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들도 숨죽이고 그 전쟁의 경과와 승패를 지켜보았고, 전쟁의 결과에 따라 다시금 동북아시아가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판세에서 그동안 얻은 경험과 기억에서 누가 더 많이 배웠는가가 이후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바로 그런 역사의 경험을 환기하는 장면들이 이어지게 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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