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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침공에 천도…외척 국정농단도 이어져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36> 백제 문주왕·삼근왕

기사입력 2020. 09. 16   15:55 최종수정 2020. 09. 16  16:17


충남 공주 공산성 안의 백제 성벽. 한성에서 천도한 문주왕이 이 성안에 머물렀다. 필자 제공


문주는 개로왕의 아우였다. 왕제는 조미걸취(생몰년 미상)와 목협만취(생몰년 미상) 장군의 엄호 아래 서라벌로 향했다. 신라 자비왕(20대·재위 458~479)을 알현하고 절박한 읍소 끝에 원군 1만 명을 얻어 백제로 귀환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이 이끈 3만 대군과의 아차산(사적 제234호·서울시 광진구) 전투에서 백제군은 전멸했다.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한 뒤였다. 왕의 가족들도 참수당했다. 백제 조정은 서둘러 왕제를 22대 문주왕(재위 475~477)으로 즉위시켰다. 475년 9월이다.


5세기 후반 한반도 4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국제 관계는 상대국 간 이해 충돌에 따라 수시로 돌변했다. 고구려·백제는 본디 이복형제(시조) 국가였으나 끊임없는 영토 분쟁으로 앙숙 간이었다. 371년 중원(중국)의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 근초고왕(13대)이 고구려 고국원왕(16대)을 전사시킨 이후로는 회복 불능의 적국이 되고 말았다. 장수왕이 개로왕을 참수하고 “마침내 고국원왕(장수왕 증조부)의 원수를 갚았다”고 천명한 건 이 같은 구원(舊怨) 때문이었다.


신라는 강대국 고구려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도 백제와 나제 군사동맹을 체결해 자국 상황에 유리하도록 입장을 반전시켰다. 백제는 가야·왜와 화평관계를 유지하며 신라를 공격하도록 양국을 사주하는가 하면 신라를 공격한 고구려와 전쟁도 불사했다. 신라가 백제에 원군을 파병한 이후 가야·왜의 신라 침공은 한동안 감소했다. 백제의 중재 덕분이었다.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가야 질지왕(8대·재위 451~492)은 백제와 교역을 단절했다. 4국 모두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 각자도생이었다.


폐허가 된 한성을 둘러본 문주왕은 절망했다. 궁궐은 전소돼 침전이 사라졌고 성곽도 무너져 잔해만 나뒹굴었다. 한강 건너편에 포진한 고구려군은 언제 재침해 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왕실 권위는 추락했고 한성 귀족과 백성들은 무기력한 왕실을 원망했다. 왕은 조정 대신들과 격론 끝에 웅진(충남 공주) 천도를 결심했다. 수도를 이전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시조 온조왕 13년(BC 6) 정도 이후 481년 동안 백제를 지탱해 온 왕도 한성이었다.


475년 10월(음력) 하순의 초겨울. 이날 한성에는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며 음산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왕은 왕실·귀족과 신료들을 대동하고 서둘러 한성을 떠났다. 며칠간의 행차 끝에 웅진 공산성(사적 제12호·충남 공주시 금성동 53-51)에 행궁(왕의 임시 거처)을 마련하고 주변을 살폈다. 웅진(곰나루)은 북동쪽에서 흘러드는 금강이 공산성을 감싸 돌아 외침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새 도읍지 웅진에서의 치세는 순탄하지 않았다. 산적한 문제들이 첩첩산중의 태산 같았다. 굴욕적 패전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천도인 데다 신료들 간 내분으로 왕은 정국 수습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정국 혼란을 틈탄 북방의 말갈 남침과 거듭된 역모로 국정은 통제 불능 지경이었다.


왕은 웅진 천도로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와 외척 해씨, 진씨 등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들은 새로운 택지 조성과 농지 분배 과정에 온갖 횡포와 술수를 동원했다. 요지 선점을 위해 경쟁자를 살해하고 도적들과 결탁해 사익을 챙기기도 했다. 한성에서 따라온 수백 호의 난민들은 당장 주거지와 식량을 공급하라며 폭동을 일으켰다. 옛 수도 한성에서는 백제왕이 왕도를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주했다며 고구려군에 자진 부역하고 신라 국경의 성주와 내통했다.

공산성 정상의 공산정. 금강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필자 제공


백제 왕실과 조정은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삼한(마한·진한·변한) 시대부터 웅진의 토착 세력으로 거주해 온 마한 귀족들의 필사적 도전이었다. 사택씨, 백씨, 연씨 등 10개 성씨가 한성 백제에 대한 저항 세력의 선봉이었다. 이들은 지극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중원을 탈출해 온 백제인들에게 마한 왕이 온정을 베풀었더니 도리어 마한을 멸망시켰다며 원수로 여겼다. 백제 건국(BC 18) 후 493년이 지난 당시(475)까지도 골수의 원한으로 잔재해 있었던 것이다. 마한 유민들은 한성 백제인들과 왕래하면서도 내심을 발설하지 않았다.


백제의 웅진 왕도 건설은 시련을 거듭했다.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였던 목지국(目支國, 충남 직산·아산·예산 지역)과 벌음지국(伐音支國, 충남 공주시 신풍·유구, 홍성·청양 일대) 유민들도 한성 백제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거나 협조를 거부했다. 이 같은 한성 백제인과 마한 유민들 간 억하심정이 백제 망국에 일조했다는 일부 사학계의 분석도 있다. 660년 7월, 백제 의자왕(31대·재위 641~660)이 나당연합군에 쫓겨 공산성에 패주해 왔을 때 웅진의 마한 유민들은 의자왕을 외면했다.


문주왕은 성품이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었다. 해씨·진씨의 외척 세력 간 권력 투쟁에 늘 지쳐 있었다. 왕권을 능가하는 외척 해구(생몰년 미상·병관좌평)의 세력 견제를 위해 아우 곤지(?~477)를 내신좌평에 임명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해구는 자신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로 여겼던 문주왕마저 시해했다. 『삼국사기』에는 ‘왕 3년(477) 3월 5일 웅진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고 기술돼 있다. 왕은 재위 2년 2개월 동안 백성들 원망만 듣다가 외척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해구는 13세 된 문주왕 장남을 23대 삼근왕(재위 477~479)으로 즉위시키고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다. 한낮의 태양도 진종일 중천에 떠 있는 게 아니다. 백성들과 다른 귀족들이 해씨 세력에게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외척인 진씨가 나섰다. 진씨는 8대 고이왕(재위 234~286)부터 17대 아신왕(재위 392~405)까지 170여 년간 조정 권력을 농단했던 세력이다. 삼근왕 2년(478) 2월, 진씨 세력의 수장인 좌평 진남(생몰년 미상)이 병력을 동원해 궁성을 장악했다.


진남은 대두성(충남 공주시 사곡면 무성산성)으로 피신한 해구와 그 가솔들까지 추포해 참수한 뒤 공산성 앞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탱천하던 권력의 비참한 종말이었다. 허수아비 어린 왕이 권력 행사에 장애가 되는 것은 진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듬해(479) 11월, 진남은 삼근왕을 살해하고 왜에 체류 중인 모대(牟大·곤지 아들)를 입국시켜 24대 동성왕(재위 479~501)으로 즉위시켰다. 백성들 사이에는 백제에 망조가 들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조정에서는 ‘3근짜리 왕’이라는 의미로 묘호를 삼근왕(三斤王)이라 작호했다. 문주왕·삼근왕 부자는 공교롭게도 2년 2개월씩 용상에 앉았다가 비명에 생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스러졌다. 두 임금의 능에 관한 기록은 전해 오지 않는다.


“문주는 급히 신라로 가 자비왕한테 원병을 청해 백척간두에 선 백제를 구하도록 하라. 짐은 고구려군과 끝까지 싸워 수도 한성을 지켜낼 것이다.”


특명을 내리는 백제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의 용안은 비장했다. 연이은 어명은 최후를 각오한 유훈이었다.


“짐이 어리석어 장수왕의 간자 도림에게 속아 종묘사직에 득죄함이 크다. 혹여 보위 유고 시에는 문주가 대통을 승계해 천년 사직을 보전토록 하라.”


시립한 조정 대신들이 부복해 통곡했다. “전하, 부디 참람한 옥음을 거두어 주소서!”



필자 이규원은 세계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사)한국언론인연합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조선왕릉실록』, 『대한민국 명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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