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op.co.kr/A00001617988.html


‘공안 대부’ 홍승상이 김순호를 경찰로 파격 특채한 숨은 이유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로 설 자리 잃은 대공경찰 살려낸 인노회 사건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22-08-16 10:50:44 수정 2022-08-16 13:52:20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 ⓒ경찰청 제공


최근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가 33년 전 인천과 부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동료들을 치안본부에 밀고한 대가로 경찰(경장급)로 특별채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 김순호는 인노회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던 당시 돌연 잠적하더니 동료들이 기소된 지 두 달 만에 경찰로 특채됐다. 당시 그를 핵심 혐의자로 체포하기는커녕 오히려 파격적으로 채용한 사람은 ‘공안 대부’로 꼽히던 홍승상이었다고 한다.


김순호는 자신이 동료들을 밀고했다는 의혹은 전면 부인하면서, 단지 ‘증거분석 능력’을 인정받아 특채된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김순호가 경찰 특채에 상응할 정도의 ‘공’을 세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만약 그렇다면 김순호는 대체 어떤 ‘공’을 세웠던 것일까. 단지 동료들을 밀고했다는 것만으로 경찰로 특채될 정도의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인노회 사건은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가 적용된 사건으로, 당시 공안정국의 신호탄이 됐다는 점에서 그 답을 추측해볼 수 있다.


“공안정국의 지옥문을 열었던 인노회 사건,

대공조직의 난파선을 건져 올렸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15년 만에 처음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로 1988년 2월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을 뒤로 하고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이런 뜨거운 사회적 분위기를 급격히 냉각시킨 사건이 바로 인노회 사건이었다.


인노회에 대한 경찰의 강제 수사가 시작된 시기는 1989년 1월로,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쯤 됐을 때였다. 그해 2월에도, 4월에도, 5월에도 인노회 간부와 회원들이 줄줄이 경찰로 강제 연행됐다. 인노회 사건은 그해 6월 15명의 기소로 일단락이 됐고, 인노회는 이후 와해됐다.


인노회 사건은 제6공화국 출범 후 처음으로 터진 공안사건이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인노회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라며 “공안정국의 지옥문을 열었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한 교수는 “88년 서울올림픽으로 잠시 분위기가 풀려 있다가 급속하게 탄압 국면으로 들어가는데, 그게 89년 공안정국”이라고 설명했다.


1989년 2월 17일자 한겨레신문의 인노회 사건 기사. ⓒ자료사진


1988년 7월 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계기로 민간차원에서 통일에 관한 논의가 터져 나오고 남북교류 주장이 대두되면서 1989년 봄부터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에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봄바람이 불었던 정국이 급격하게 얼어 붙었는데, 이런 상황을 ‘공안정국’이라고 불렀다. 국가보안법 적용을 남발하며 용공 조작 사건을 일으키던 지난 제5공화국과는 거리를 두는 듯했던 정부의 태도가 1년 사이에 변한 것이었다. 한 교수는 “88년은 지하조직이 합법공간이 된 지상으로 올라오던 시점”이라며 “이때 인노회가 표적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인노회 사건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항쟁 이후 설 자리를 잃은 대공조직이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고 만든 사건으로도 평가된다. 인노회 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보고한 사람으로 알려진 홍승상이었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홍승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 대상에선 빠졌다. 한 교수는 “박종철은 대공3부 5과 2계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홍승상은 그때 1계장이었다”며 “홍승상은 조사를 받았지만 풀려났다”고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윗선이 사라진 대공조직에서 살아남은 홍승상은 대공조직을 재건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이는 홍승상의 저서 〈현장에서 본 좌익의 실체〉에도 잘 나와 있다. 그 책에는 당시 제6공화국 출범으로 인해 ‘안보가 불안정해졌다’면서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홍승상은 “제6공화국 출범을 전후해 국내 안보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노태우 정권은 출범 당시부터 민주화운동세력으로 위장한 좌익세력에 의해 거의 무기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대공요원들에게 ‘우리가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다’고 하면서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우리가 아니면 어느 기관 그 누구도 해낼 수가 없다고 다그치면서 대공수사요원을 상대로 1주일간 사상무장을 시켰다”고 회고했다.


실제 대공조직 재건 움직임은 제6공화국 출범 후 조용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1988년 7월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일으켰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극비리에 이전했다. 두 개의 건물을 합친 크기였다. 동시에 전국 경찰서에 대공과가 설치됐다. 한 교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공이 타격을 입고 (공안사건을)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조직을 확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첫 공안사건이 바로 ‘인노회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 교수는 “인노회 사건은 공안정국을 여는 사건이자, 대공 난파선을 건져 올린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승상은 저서에서 ‘인노회 사건’을 “주사파가 노동운동권에 최초로 뿌리 내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홍승상은 “대학 출신 노동자 6명에 대해 이적단체로 서울지검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6공화국 들어 첫 번째 사건이기 때문에 검찰에서는 신중을 기했다”며 당시 인노회 사건 당사자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속영장 청구는 “인노회가 이적단체라는 소명자료가 부족할 뿐 아니라 제출된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인 것으로 보여진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그러자 수사당국은 판사만 바꾸어 재청구해 결국 구속영장을 받아낸 바 있다.


이에 대해 홍승상은 “재영장이 발부되자 순식간에 경인공단 등 전국의 산업현장에서 장기파업을 주도하던 좌익세력의 기세가 한 풀이 꺾이고 말았다”며 “안보정국에 크게 기여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 결과였을까. 홍승상은 이듬해인 1990년 1월 경정으로 승진했다.


고 박종철 열사 사망 31주기 하루 전인 2018년 1월 13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박종철 열사 사진 앞에 경찰청 지휘부가 헌화한 국화꽃이 놓여 있다. ⓒ김철수 기자


“만약 김순호가 인노회 사건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면,

그는 대공조직의 난파선을 구원해낸 사람”


이처럼 죽어가던 대공조직을 부활시킨 인노회 사건에 만약 김순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어땠을까. 한 교수는 “저쪽(대공조직) 입장에서 볼 때 김순호는 하나의 사건을 제보한 사람이 아니라 ‘대공 난파선’을 구원해낸 사람”이라며 “홍승상을 비롯해 (대공조직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던 시점에 김순호를 잡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김순호는 단순히 자신이 한 일을 ‘자백’하거나 인노회 동료들을 ‘밀고’하는데 그쳤을까. 김순호는 적극적인 밀고자, 즉 수사당국의 ‘프락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실제 김순호가 대학생 시절 학내 운동권 서클인 ‘심산연구회’에서 활동하던 도중 1983년 4월경 군에 강제징집됐다가 같은 해 11월경 이른바 ‘녹화사업’ 대상자가 됐는데 그때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정황이 담긴 보안사령부의 보고서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김순호가 다른 ‘녹화사업’ 대상자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정보 파악 및 보고 활동을 한 정황이 담겨 있다. 김순호가 앞서 YTN과의 인터뷰에서 “녹화사업 당시 공작 활동과 관련해선 누굴 만난 뒤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친구들과 술 마신 내용 등만 보고해 별일은 없었다”고 해명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김순호가 전역 후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고 인노회에 가입해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던 당시에도 ‘프락치’ 활동을 계속 했는지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인노회 사건 당시 그가 돌연 잠적했던 점, 김순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인노회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이미 알고 있었던 점, 인노회 사건을 담당했던 대공수사3과로 갑자기 특채된 점 등 여러 정황이 김순호가 휩싸인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 교수는 “김순호가 놀랍다”고 말했다. 한국현대사를 연구했던 한 교수는 “프락치는 출세를 못한다. 어디서든 취직을 안 시킨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기 때문이다”라며 “역대 ‘프락치’ 중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순호는 (많은 ‘녹화사업’ 대상자들 중에)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하는데 김순호라서(특이해서) 그렇다”고 꼬집었다.


그런 면에서 홍승상이 최근 TV조선과 익명으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홍승상은 “특채로 내가 (김순호를) 받으려 할 때도 (윗선에서) ‘만약 저 사람이 배신을 하게 되면 당신이 책임지겠냐’ 그래서 ‘내가 책임지겠다. 어떤 특명이든 책임지겠다’면서 특채를 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순호에 대한 강한 믿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홍승상은 또한 “그 사건(인노회 사건)을 할 때 많이 (김순호) 도움을 받았어. 안보 정국을 전환시키는 데 내가 봐서는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어 “김(순호) 국장이 운동권에서 완전히 빠져나왔고, 수사에 도움까지 줬잖아”라며 “그래서 내가 특채로 그렇게 받아준 거야”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순호는 최근 MBC라디오에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고만 말했다. 현재 홍승상 인터뷰 기사 전문은 삭제된 상태다.


인노회 사건 이후 경찰이 된 김순호는 이후에도 대공 분야를 주로 담당해왔다. 경찰국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에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안보수사국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김순호는 실적도 꾸준히 쌓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성만 의원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김순호 치안감 포상 및 상훈 기록’에 따르면, 김순호는 1989년 8월 경장 특채 후 1990년 9월과 11월 각각 ‘범인 검거 유공’을 사유로 치안본부장상을 받는 등 총 7차례에 걸쳐 상훈을 받았는데, 그 시기가 대공수사3과 등 대공·보안 관련 부서에서 근무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런 만큼 승진 역시 ‘초고속’이었다. 


어쩌면 김순호에게 홍승상은 인생의 은인이자 롤 모델이지 않을까.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이 신설된 것을 두고 치안본부의 부활이라는 비판과 공안정국 조성의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