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왕 - 위키

고구려/왕 2011. 10. 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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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고국원왕(故國原王, ?~371년, 재위 331년~371년)은 고구려의 제16대 이다. 이름은 사유(斯由) 또는 쇠(釗)라고 하며 미천왕의 아들이다.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

생애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335년에는 신성(新城)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前燕)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전연과의 전쟁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郭充)과 동수(佟壽)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後趙)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封抽), 송황(宋晃)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은 용성(龍城)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武)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周氏)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남소(南蘇)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高句麗王)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慕容評)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백제와의 전쟁  

백제가 369년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을 이용하여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렀는데 백제사람 사기가 고구려 군사의 기밀을 알려주자 쉽게 쳐서 깨뜨리고 수곡성까지 영토를 넖혔다. 근구수 태자가 추격하려는데 장군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하여 말리자 추격을 멈췄다.또,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포로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국원왕은 복수를 하기위해 371년에 군사를 일으켜 재침공하였다. 근초고왕은 패하(浿河)가에 군사를 매복시켜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근초고왕은 기세를 타서 겨울에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함락하기 직전이었으나 흥분한 고구려군사의 결사항전이 심하여 물러났다.

고국원왕 사후 소수림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전열을 재정비 하고 375년 7월에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이 반격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근초고왕은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1월 근초고왕이 승하하고 태자 근구수가 즉위하였다. 376년 11월에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 갔다. 377년 근구수왕은 고구려의 잦은 도발에 노하여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재침공 하였다. 그러나 전열이 갖춰진 고구려를 못이기고 패퇴하였다. 보복으로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이후 전면전 대신 양국의 도발행동이 이어졌다. 386년 새로 즉위한 진사왕이 고구려의 침략에 방비하자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387년 9월에 고구려가 말갈(靺鞨)을 이용하여 관미령(關彌嶺)으로 침공하여 승리하였다. 389년 9월에 진사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한편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近仇首)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浿河)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故國)의 들(原)에 장사지냈다.

가계   

함께 읽기  

고국원왕이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아 안악3호분을 만들었으리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안악지애사》가 있다.[1]

참고  

주석
1.  고구려 뮤지컬 《안악지애사》


전 대
미천왕
제16대 고구려 국왕
331년 - 371년
후 대
소수림왕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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