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r.blog.yahoo.com/shim4ro/1663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1 - 소년왕 광개토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0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2 - 관미성 공방전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1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3 - 평양을 지켜라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2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4 - 비려 정벌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7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5 - 아리수를 건너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9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6 - 경자 대원정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0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7 - 광개토대왕의 위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2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8 - 북연과의 종족동맹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4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9 - 407년 광개토대왕이 향한곳은?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5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10 - 단군의 후예 四海를 평정하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6
      광개토대왕의 북방 대원정 1 - 391년 거란 정벌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9
      광개토 대왕의 북방대원정 2 - 비려 원정의 중간 거점지 양평도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90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5 - 아리수를 건너다

서기 396년 광개토 대왕 6년, 아리수 즉 지금의 한강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관미성을 비롯한 그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주로 공성전과 수성전을 위주로 한 요새 탈환 전쟁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있었던 한반도 내 전쟁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은 광개토 대왕비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대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서 가장 많은 논란 거리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비문의 내용을 우선 살펴 보자.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하고(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 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模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 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성(頁□□□□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 城), 어리성(於利城), □□성,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임성(林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보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 穰城), 증□성(曾□城), □□노성(□□盧城), 구천성(仇天城)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여생구(南女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太王)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노태돈 박사의 해석임*

첫번째 논쟁은 과연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며, 조공을 바쳤냐는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장수왕이 선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과대포장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는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 시절,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로부터 인질을 받은 만큼, 거기에 따른 조공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오래전부터 혹은 예전부터라는 뜻을 가진 舊 (구)자인데, 이것은 광개토대왕 이전부터도 조공이 있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조공은 동북아 국제사회에 당연시 되는 무역절차이다. 즉 백제와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국제교역을 위해 조공절차를 밟았을 것이고, 고구려는 속민의 예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따라서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문장이라고 볼 수 없다.
 
두번째는 而倭以辛卯年來 度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란 한줄의 문장을 놓고 벌이는 극렬한 논쟁이다. 다만 비문에는 띄어쓰기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쭉 세로 한줄로 나열되어 있다. 우선 한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보자. 

신묘년에 왜가 건너왔다.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렸다. (??)신라가 이로써 신민이 되었다. 그런데 도해라는 글자를 앞문장에 붙이면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문장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임라 일본부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문장에 대해서는 다수가 광개토대왕이 백제 침공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 과장이란 설명은 사료해석을 접근하는 태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신라 앞에 사라진 두 글자가 있었으면 좀더 정확한 해석이 나왔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일제시대,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글자도 변형하고 변형이 불가능한 글자는 아예 삭제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최종 확인할 정확한 근거는 아직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속민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고 해석해야 된다고 본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王躬率水軍(왕궁솔수군)이라는 문장이 나와있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친 주체가 고구려였다는 가장 분명한 근거가 나와있지 않은가? 일찌기 해상작전은 관미성공략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이 있다. 또 이동경로가 적에게 쉽사리 노출되는 육상보다는 해상으로의 이동이 효과적일 수 있으며, 아리수를 건너 백제 수도를 치는 일도 수월하였을 것이다.

세번째 논쟁은 이 전쟁이 정말 지금의 한강변에서 일어 났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평양에서 한강까지 가는데 구태여 해상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문에서 출발한 논쟁은, 대륙백제설로 연결돼 아리수 전투를 황하강 일대의 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또 관미성 전투에서 이미 고구려는 임진강 하구까지 장악하였는데, 그렇다면 과연 임진강에서 한강사이의 지역에 위에서 언급한 50여 성이 존재 하였겠느냐는 회의론도 주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백제의 풍납토성에서부터, 그 주변 몽촌토성과 아차산성, 북한산성, 광주 이상산성등 현서울 인근에만 5~6기의 백제성곽이 확인된다. 더구나  고구려와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당시 상황에서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한강 북부의 성곽축조가 더욱 활발했을 것이다.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수도를 포위했다는 기록에서도, 백제 땅을 통체로 중국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한강 유역에서 벌어졌던 전쟁이 확실하다. 가끔 우리나라 역사의 무대를 통체로 중국으로 옮겨놓고 음모론과 조작론으로 일관하며, 정작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한 정체성 문제는 외면한 비약적인 해석도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
모든것이 반드시 중국 땅에서 벌어져야만, 제대로 된 역사해석이란 태도는 도리어 중국에 대한 막연한 모화사상이 아닐까 싶다. 

서기 396년 광개토 대왕 6년 아리수 전투, 고구려는 수상작전을 선택하였고 백제는 미처 그것을 예상 하지 못하였다. 정보력의 부재는 승부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과는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삼국사기 그 어디에도 이 전쟁이 기록되어지지 않아, 심지어는 이 전쟁을 관미성 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논쟁거리이다. 주요 근거는 각미성이란 성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관미성의 고구려식 표기이거나 아니면 오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접근방법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도데체 각미성과 관미성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관미성 전투와 아리수 전투는 무려 5년이나 시차를 두고 벌어졌던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 자체도 전혀 틀리다. 더구나 관미성은 백제 진사왕 때 벌어진 전쟁이 아니었던가? 이 두 전쟁을 동일시 볼 수는 없다.

백제 아신왕 6년에 보면 왕은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잡혔다는 내용의 기록이 나온다. 또 아리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대승을 거두고 천명의 포로와 왕의 아우, 10명의 주요 대신들을 잡았지만, 가장 중요한 백제 태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신왕 6년이라면 아리수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이다. 아신왕은 자신이 굴욕을 당하며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이 될 것을 맹세하였지만 아들에게만은 그러한 굴욕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일본으로 보낸 것은 이후 있을지도 모를 고구려의 왕자 인질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서기 396년 아리수 전투는 분명히 실재 하였던 전투였으며, 그 주요 장소는 지금의 한강이었다.


광개토태왕 목록  http://tadream.tistory.com/2232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