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bywoon1227/16493723 

고구려의 역대 영토 변천사
caelum(phs7856)


[제1대 추모성왕(동명성왕) / B.C. 16년경]
 

졸본부여(구려국)를 장악한 추모성왕은 졸본을 기점으로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제2대 유리명왕 / A.D. 16년경]
 

유리명왕은 선비 토벌 전쟁을 시작으로 양맥(천산산맥 주변) 등을 정벌했다.

 
[제3대 대무신왕 / A.D. 40년경]
 

대무신왕은 동부여에 진출하고 개마국, 구다국(개마고원 일대)과 낙랑국(평안남도?)을 병합했다.
 
 
[제5대 모본왕 / A.D. 49년경]


모본왕은 상곡, 태원(요서)등을 기습 공격했다.
 
 
[제6대 태조대왕 / A.D. 125년경]


태조대왕은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10성을 쌓고,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를 병합했으며 책성지역과 요동군, 현도군을 공격했다.

 
[제8대 신대왕 / A.D. 168년경]


차대왕 이후 왕권이 약화되어 고구려의 내부사정이 혼란하자, 후한이 태조대왕때 차지한 요서지역을 수복했고 그 무렵 선비족의 세력이 확대되어 중국대륙(이하 중원)과 요동으로 진출하자, 북부여 또한 현도를 침입했다. 
 
 
[제11대 동천왕 / A.D. 245년경]


동천왕은 위나라와 초기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위나라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키며 직접 국경을 맞대자 요동을 공격하여 위나라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총사령관으로한 1만여 병력 및 선비족 수만의 병력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 처음에 동천왕이 이들을 격퇴시키며 요동 깊숙이 적들을 쫓아가자 위-선비 연합군이 반격하여 환도성(국내성 북쪽의 비상시 대비 산성)까지 공격해 왔다. 그래서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신을 갔다. 결국엔 장수 유유가 계책을 세워 현도 태수 왕기를 죽이므로서 위-선비 연합군은 물러갔다. 한편 245년에는 신라와 전쟁을 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이 되어있다.
 
 
[제15대 미천왕 / A.D. 319년경]


미천왕은 태조대왕때의 영토를 수복하려 노력했다. 단 선비와 대치 했으며 요동을 공격하고, 모용 선비의 책성(대릉하 주변)을 공격했다.
 
 
[제16대 고국원왕 / A.D. 371년 경]


고국원왕대에는 모용 선비가 전연을 세워 요동과 화북지방을 압박했다. 전연의 침입으로 고구려는 국내성이 합락되어 미천왕의 시신을 갈취당하고, 태후와 왕후를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문에 고국원왕은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그 틈을 노려 강성해진 백제가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이를 막던 고국원왕은 전사하고 만다 .
 
 
[제19대 광개토태왕 / A.D. 412 년경]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광개토태왕은 대외적 정벌은 시도했다. 그 결과 백제를 공격하여 모두 68개의 성을 함락시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고, 동예를 통합하고 속국이 된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시키고 지금의 김해까지 진출하여 김해 가야를 도륙냈으며, 동부여 64성을 차지하여 동부여를 통합하고 비려를 정벌하고 후연의 숙군성(.(대릉하 주변))까지 진격했다. 또한 한때 유주(베이징)지역까지도 지배했었다.<유주자사 진의 북경 일대 지배 (덕흥리 고분)>
 
 
[제20대 장수왕~제21대 문자명왕 / A.D. 475~500년경, 고구려 최대 강역(영향권 포함)]


귀족들의 내부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광개토태왕이 대대적 정벌을 꾀했다면, 장수왕은 귀족들의 소굴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를 강행하여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 때문에 천도한 평양을 기점으로 백제와 신라 또한 압박하여 남쪽 국경을 아신만에서 영일만까지 확대했다. 또한 후연이 멸망하고 생겨난 북연이 북위 때문에 멸망위기에 놓이자 북연의 수도를 점령하고 북연을 멸망시켰다. 강대국 고구려를 상대로 최강대국 북위 또한 고구려와 화친을 꾀하였고 그 때문에 유목강대국 유연은 지두우 지역을 고구려와 분활지배 했다. 화남지방의 송나라(다음 왕조 제나라)또한 고구려와는 결코 적이 되려 하지 않았다. 
 
문자명왕때는 북위의 북경 변방을 습격했으나 취하지는 못했다. 어쨌건 북위는 이에 대해 트집을 잡지도 않았다. 중원이 남북으로 갈라져 힘이 분산되어 고구려를 쉽게 제어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국력이 그 만큼 강대하지 않았다면 중원 남북조와 결코 고구려는 대등한 서열에 위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22대 안장왕 / A.D. 525년경]


이미 장수왕시절 체결된 백제와 신라의 공수동맹이 문자명왕대에 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가 제어 할 수 있었으나 안장왕시절에는 고구려 남부지역을 상당히 잃었다. 그 때문에 안장왕은 다시 한반도 이북에 군시력을 강화했으며 백제를 공격했다. 또 요서지역의 유성(조양)을 공격하여 지속적으로 고구려가 요서지역의 일부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제25대 평원왕 / A.D. 578년경]


안원왕이후 고구려는 내부 외척세력 및 귀족들의 타툼으로 사정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나제동맹군에게 한강지역을 모두 빼앗겼고 유연을 멸망시키고 몽골지역의 패자가 된 돌궐 또한 신경쓰지 못했다. 그러나 전보다는 내부사정이 안정된 평원왕대에는 다시 옛 고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돌궐이 침입하자 돌궐을 격퇴하여 거란의 지배권 및 북만주일대에 영향력을 다시 강화했으며 배산일대(요서 또는 요동지역)에 쳐들어온 북주군을 격퇴했다. 또한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일대를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26대 영양왕 / A.D. 612년경]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북주는 국호를 '수' 로 바꾸고 주변국들을 제패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평원왕 시절부터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해왔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이 수 황제에게 입조하라고 서신을 보냈다. 이에 대해 영양왕은 사신의 목을 베고 그 뒤 요서일대를 선재공격했다. 수나라가 당황은 했지만 애초에 수나라 또한 서신의 내용이 굴욕적인 것을 감안했을 것임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예상하고는 있었을 테지만 막상 고구려가 선재공격을 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영양왕의 선재공격과 병마원수 강의식의 고구려 6만 병력은 임유관을 공격하였으나 빼앗지는 못했지만 수나라 30만 육해군을 대패시켰다.(-이하 수나라의 침입내용은 쓰지 않겠다.) 또한 영양왕은 남진하여 옛 장수왕대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했다.
 
 
[제28대 보장왕 / A.D.668년경] 


영류왕을 시해하고 조카 보장을 옹립하여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보장왕 즉위 초기 요서일대이 영주를 공격하여 요하 서쪽 무려라에서 당과 국경을 맞대어 당에 대해서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에 당태종의 친히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끝내 안시성 전투에서 회군하였다. 이때 민족사관학자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회군하는 당나라 군대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깊숙이 따라갔다고 주장한다. 연개소문은 북경지역에 '고려성' 이라고 명시된 여러개의 성을 쌓아 그 지역을 잠시 고구려가 지배했다고 한다. 이후 당고종대에는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의 배후를 끊어 신라와 함께 앞뒤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연개소문이 살아있을때에는 멸망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내부분열로 결국 망국의 길로 갔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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