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post.co.kr/news/10099


'을파소'의 승부수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의 등장
 임동주 서울대 겸임교수 (발행일: 2009/06/07 17:04:05)  

을파소는 안류와 같은 고국천왕 대의 사람이다. 안류의 천거로 궁궐에 불려간 을파소는 왕과 일문일답을 벌이게 된다. 고국천왕은 여러모로 을파소를 떠 본다. 짐짓 을파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만하게 대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을파소에게 창피를 당하고 나서야 을파소가 여간내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왕은 을파소를 상석에 앉히면서 다시 말했다. 

“안류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를 얻으면 곧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고 했소.” 
“어찌 이 어리석은 것이 안류 선생과 비교 되겠나이까.” 
“짐이 능력이 없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답보 상태요. 선생은 나라를 위해 좋은 가르침을 내려 주시오.” 
“문제는 공신의 후손들과 외척을 비롯한 국척들이 권세를 잡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법을 바로 세워 이들의 행실을 엄중히 바로잡아 백성들의 살길을 열어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짐이 선생을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고 작위를 더해 우태로 삼을 것이니, 썩은 세력들을 처단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내려주시오.” 

을파소는 고개를 저었다. 
“미련한 신으로서는 그처럼 큰일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폐하께서는 저보다 훌륭한 사람을 뽑아 합당한 관직을 내려 대업을 이루게 하시옵소서.” 

을파소는 거절한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을파소가 기존의 막강한 5부 세력들과 공신, 국왕의 친인척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 일을 하기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지위와 절대적인 국왕의 지지가 필요했다. 중외대부 정도의 벼슬로는 이런 큰일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을파소의 심중을 헤아린 왕은 즉시 신하들을 모이게 했다.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모든 국정을 그에게 맡기겠노라.” 

신하들은 이구동성 반대했지만 왕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을파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상에 올라 고구려를 반석위에 올리게 된다. 을파소는 먼저 기강을 세워 공신과 친인척 그리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일소했다. 

다음에는 말썽 많은 5부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것 역시 기존 5부 세력을 통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을파소는 5부를 동, 서, 남, 북, 내 등 방위개념으로 바꾸었다. 또 각부의 부장들의 권력을 크게 약화 시켰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3세기 말 서천왕 시절에 가서는 기존 5부가 해체되고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외에도 유명한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는데 진대법은 춘궁기인 3월에서 7월까지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다시 돌려받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고구려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명실상부 부국강병을 이루게 된다. 

요즘 관직제도와 많이 달라 중외대부를 무어라고 단정 지울 수는 없지만 차관 정도의 벼슬이다. 아무런 검증도 안 된 사람에게 이것도 막중한 직위이지만 을파소는 단칼에 뿌리쳤다. 차관 정도의 벼슬로 장관들이나 국왕의 친인척을 다룰 수는 없는 것. 이왕 정치를 잘해 명성을 남기려면 우물쭈물하는 것보다 분명히 소신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 서울대학교 겸임교수, 도서출판 마야 대표 (임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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