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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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독립군의 형성과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4. 봉오동 전투의 대승
(3) 봉오동 대첩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 홍범도는 국내 진격작전을 구상하여 실천을 준비하고 있던 도중 대규모 일본군의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군과의 접전에 대비하여 6·7일경 봉오동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미리 피신하게 하였다. 그는 최진동과 상의하고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맞이하여 섬멸할 결심을 굳혔다.
* 대한북로독군부 : 1920년 대한독립군(홍범도), 대한국민군(안무), 군무도독부(최진동) 독립군 연합 부대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8_0040_0010_0020_0010_0040
* 봉오동 : 지린/길림성 옌벤/연변주 투먼/도문시(图们/圖們市) 스셴/석현진(石峴镇/鎭) 수이난/수남촌(水南村) 투청/토성리(土城里), 가오리툰/고려둔(高丽/高麗屯) 일대 https://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14487&localCode=krcn https://tinyurl.com/yksc4cyw (구글어스) https://maps.app.goo.gl/tzc1x94VB7V9VSi26 (구글지도)
* 최진동(崔振東) : 일제강점기 때, 옌벤/연변 왕칭/왕청현에서 독군부를 조직, 홍범도와 연합작전. 봉오동전투에서 사령관, 으로 활약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자유시참변 이후, 자유시/흑하/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Svobodny)를 중심으로 활동 https://namu.wiki/w/%EC%B5%9C%EC%A7%84%EB%8F%99
봉오동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이고 가운데는 약간의 평지가 있었는데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천연의 요새지라고 할만 했다.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25리 정도로서 골짜기 입구로부터 하·중·상의 세 마을이 있었고 한 마을은 대개 30내지 60호 정도의 집이 모여 있었다.
사령부장 홍범도는 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작전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부대를 배치하였다.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東山)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北山)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西山) 남쪽 끝에 매복하여 적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서산 중턱의 북쪽 끝에 자리잡았다. 범도(홍범도)는 부대의 배치가 끝나자 적이 올 때에 척후병을 그대로 통과시킨 뒤 본대가 독립군의 포위망 가운데에 들어오면 호령을 시작으로 공격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군무국장 이원은 예비대로서 본부 병력 및 나머지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 산간에 있게 하여 병력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 보급을 지원케 하였다.
* 이천오 : 간도국민회, 대한북로독군부 제1중대장 활동
* 봉오동 상촌 https://omn.kr/20do5
* 강상모(姜尙模) : 군무도독부(최진동) 소속. 대한북로독군부 중대장
* 강시범(姜時範) : 군무도독부(최진동) 소속. 대한북로독군부 중대장
* 조권식(曺權植) : 대한국민회군(안무) 소속. 대한북로독군부 중대장. 2025년 건국훈장 애국장
* 군무국 : 군사 행정, 인사, 법무 및 군정 사무를 담당하는 부서
* 이원(李園) : 대한북로독군부 군무국장/군사국장(軍務局長)
홍범도는 이렇게 산하 부대를 주도면밀하게 매복시킨 뒤에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특별 명령을 내렸다. 즉 고려령 북쪽 1,200미터 고지와 그 동북쪽 마을에 잠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전진을 지연시킨 뒤에 거짓 패퇴하여 적을 유인하라는 것이었다. 한편 독군부장 최진동과 부관 안무는 동북쪽 산의 서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병력을 지휘케 했다. 신민단 부대도 북로제1군사령부 부대와 합세하여 같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화일(李化日) : 대한독립군의 분대장으로, 봉오동전투에서 활약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index=1&id=12514
* 안무(安武) : 안병호. 일제강점기 때, 한국군 진위대(고종 때 근대적 지방군) 교련관,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등을 역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725
* 신민단 : 신민회. 대한신민회. 대한신민단.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113
북로제1군사령부 : 사령부장/군사령관 홍범도
한편 일본군은 약 700명 내외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근처에서 치밀한 포위망을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7일 새벽부터 오만무례하게 봉오동을 향하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새벽 6시 30분경 이화일 부대는 월강추격대대의 전위중대와 교전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 뒤 예정대로 본대로 합류하였다. 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8시 30분경부터 11시 30분경까지 봉오동 하촌을 수색한 뒤 독립군이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 일단 집결한 다음 중촌·상촌을 거쳐 계속해서 독립군이 기다리고 있는 지점을 향해 진입해 들어왔다. 오후 1시경 적의 첨병이 봉오동 상촌에 있는 독립군의 매복지점을 통과해도 그대로 놔두자 적의 본대는 이제 독립군 매복지점 한 가운데까지 오게 되었다.
*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 : 삼둔자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의 연이은 국내진입작전에 충격을 받은 일제가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함북 경성군 나남(羅南) (현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 수비군인 제19사단을 동원, 불법으로 중국령 북간도를 침범.
* 봉오동 상촌, 중촌, 하촌 https://omn.kr/20do5
이 때 사령부장 홍범도는 적을 향해 발사하는 총성으로 공격명령을 대신하였다. 그동안 은인자중하고 있던 독립군들은 삼면 고지에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거의 두 배가 되는 700여 병력의 독립군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엄폐물로 가려진 진지에서 내려다보고 사격을 가하니 아무리 우수한 장비와 강한 훈련으로 다져진 ‘무적 황군’이라도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추격대는 가미다니 중대와 나까니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응사하고 기관총대를 앞세워 난사하며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추격대는 약 세 시간 동안 악전고투하며 막대한 손상을 입고 비파동(琵琶洞) 방면으로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쫓겨가는 적을 추격, 다수를 섬멸하였다.
* 가미다니 : 가미야(神谷)
* 나까니시(中西) : 나카니시
* 비파동(琵琶洞) : 옌벤/연변 투먼/도문시(图们/圖們市) 량수/양수진(凉水镇/涼水鎮) 피피거우/비파구/피나무골(琵琶沟/溝) https://j.map.baidu.com/a5/369M https://maps.app.goo.gl/XRGPsgxDndnpvBfE7
* 강상모(姜尙模) : 신흥평학교(新興坪學校)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龍井)과 신흥평 동포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20년 봄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에 참가. 1920년 6월 대한북로독군부가 주도하는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 참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187
봉오동 전투가 한창이던 오후 4시 20분경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이 폭풍과 함께 거세게 쏟아져 상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지는 기상의 이변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자 사령부장 홍범도는 신호용 나팔을 불어 독립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 틈을 타서 일본군은 패주한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홍범도의 직접적 지휘를 받지 않던 신민단 독립군 약 80명은 다른 독립군 부대의 철수를 알지 못하고 패주하는 도중의 적 기관총 소대와 정면으로 부딪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민단 병사들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냈고 일본군도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후일『봉오동전투 상보(詳報)』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 그들의 고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대목을 보기로 하자.
상보(詳報) : 사건, 상황을 자세히 보고, 보도
“… 상봉오동 남방 약 3천 5백미터 높이 503(미터)고지, 북방 약 천미터의 능선, 동방 약 천미터의 고지능선, 상봉오동에서 높이 445 중턱에 통하는 점선로(點線路) 북측 고지, 상봉오동 동북방 약 2천미터 높이 504 남방 고지선 및 그 서측 고지능선, 상봉오동 서측 고지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나 적(독립군)은 교묘히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그 위치가 분명치 않고 탄환은 사면에서 날아와 전황불리의 상태에 빠졌다. (중략) 공격 전진 중 일등졸(卒) 호리이(堀井茂邦)는 … 복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 소대장으로부터 후퇴명령이 있음에도 전투를 계속하기에 이르러 끝내 절명하고 … 왼쪽 방면에서 나온 나까니시, 소또야마(外山) 양 소대와 연락이 불충분하여 피아(독립군과 일본군)의 식별이 곤란하였으나 나팔을 불어 왼쪽 고지 및 골짜기를 전진 중인 양 소대와 연락을 취하고, 양쪽 고지에 척후를 보내 주력은 (패퇴로인) 비파동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 상봉오동 : 봉오동 상촌
* 점선로(點線路) ?
* 일등졸(卒) : 일제 육군 병사 계급. 한국군 일등병(일병)에 해당
* 호리이(堀井茂邦) : 호리이 시게쿠니
* 소또야마(外山) : 소토야마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겠다고 큰 소리쳤던 월강추격대대는 소탕은 커녕 오히려 궤멸적 타격을 입고 패퇴하였다. 그들은 대피하지 못하고 봉오동에 남아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16명을 학살한 뒤 패잔병을 이끌고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柔遠鎭)의 건너편 두만강변으로 와서 야영하다가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립군의 ‘봉오동 대첩’이다.
* 함북 온성 유원진(柔遠鎭) : 함북 온성군 풍서리 일대 ? https://maps.app.goo.gl/nmDMN5UnE4Srn8Dh8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냈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발표는 다분히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군은 전과를 어떻게 파악했는가?『봉오동전투 상보』에 의하면 일본군 피해가 전사 1명, 부상 2명이라 했고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33명, 부상 다수라고 하였다. 양측의 발표 내용을 보면 서로 상대방의 피해는 과장한 반면 자기 진영의 피해는 극소화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 국방부에 해당. 군무부 내에는 비서국 · 육군국 · 해군국 · 군사국 · 군수국 · 군법국 등 6개국이 소속되어 있어 이에 관한 사무를 통할, 처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609
위의 두 기록 외에도 중국신문인『상해신문보(上海新聞報)』, 간도 국민회의 호외,『독립신문』,『홍범도의 일지』,『김정규(金鼎奎) 일기』등을 토대로 냉정히 조사해 보면 대체로 일본군 측 피해는 120내지 150명 내외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독립군 측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나 추정된다.
* 상해신문보(上海新聞報) : 상하이/상해신보? 영국계
* 국민회 :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 간도국민회의. 대한국민회. 1914년 이동휘, 구춘선 등과 옌벤/연변 롱징/용정에서 조직했던 독립운동단체. 간도지역 자치단체를 통합하고, 최진동, 홍범도 부대 등을 통합, 지원. 조선독립기성회 - 대한국민회 - 간도대한국민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14 대한국민회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013
* 홍범도의 일지 : 홍범도 일지. 홍범도 장군이 말년에 자신의 생애와 항일 투쟁 과정을 회고하며 남긴 수기 https://search.i815.or.kr/contents/independenceFighter/detail.do?independenceFighterId=1-007057-000
김정규(金鼎奎) : 1910년 전후 의병활동. 1920년대 대한의군부 활동. 일제 강점기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하면서 이를 기록한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https://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2313&localCode=krcn
김정규(金鼎奎) 일기 : 용연김정규일기. 1907년부터 1921년까지 관북과 두만강 대안, 곧 북간도·연해주 등지에서 벌어진 의병과 독립군 등의 독립운동 관련 기술이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601
어쨌든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 독립군 부대가 큰 승리를 거둔 ‘대첩’이었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 몇 명 사살했다는 단순한 전투성과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립군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의 독립군 승리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전체 독립운동계와 동포들의 사기를 매우 높여주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부르면서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더욱 몰두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일제 측의 비밀보고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아(我) 월강추격대에 반항하여 교전한 불령단(不逞團)은 해(該) 전투(봉오동 전투)에서 비상한 대승리를 얻고 아군을 조선 측으로 격퇴한 것 같이 선전하고 있다. 또한 이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칭하며, 금후 계속될 전투에 대비해서 양식의 준비, 간호대의 조직, 병원(兵員)의 모집에 더욱 힘쓰고 있다…. 봉오동 방면에는 다수의 불령단이 집합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이를 기회로 하여 각 단체간의 결속을 굳게 하고 있다. 금회(今回: 이번)의 추격은 도리어 나쁜 결과를 후에 끼칠 것이라고 관찰된다….”
-6월 15일 사까이(堺) 간도 총영사 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 불령단(不逞團) : 불령선인(不逞鮮人) 1910년 일제가 조선인 중 자신들의 명령 및 지도를 따르지 않고 저항 및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지목하여 만든 용어. (직역: 원한을 품고 난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조선인) https://namu.wiki/w/%EB%B6%88%EB%A0%B9%EC%84%A0%EC%9D%B8
* 해(該) 전투(봉오동 전투) : 해당 전투
* 사까이(堺) :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 간도(間島) 지역의 일본 총영사 대리
* 간도 총영사 : 1909년 중국과 불평등 조약인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일제가 간도 용정(옌벤/연변 롱징/룡정시)에 대륙 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총영사관. https://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8164&localCode=krcn
일제의 이러한 예측(후에 나쁜 결과를 끼칠 것이라는)은 그대로 적중된다. 바로 청산리 전투를 통해서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자기의 『일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 3일(음력)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31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雲霧: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증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에로 영상(嶺上)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움하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던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도착)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한 즉 … 그 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명 죽었다.”
* 당진(도착) ?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 측은 봉오동에서 패퇴한 뒤에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일제 측의 ‘조선군’ 사령관은 독립군이 정식 군복을 착용하고 임명에 사령장을 쓰며 일정한 예식이 있는 등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고 있다고 육군대신에게 보고한 뒤 그 대책을 강구토록 요청하였다.
홍범도는 지난 날의 의병전투에 이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부대들을 지휘하며 대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그의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떨쳤다. 그는 50을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만주·노령(러시아령)지역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그린 봉오동 전투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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