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류왕(榮留王)

고구려 제27대왕. 영양왕의 이복동생
생몰 : 미상∼642년(영규왕 25).  
재위 : 618∼642년.

이름 : 건무(建武), 성(成) 
가계
     
부왕 : 평원왕
     
모후 : ?
     
형 : 영양왕
     
동생 : 고태양
            
조카 : 보장왕
     
왕후 : ?
            
아들 : 고환권(高桓權)

618년 음9월 [영양왕 29년 9월] 영양왕 죽음 영류왕 즉위함. 
619년 음2월 [영류왕 2년 2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19년 음4월 [영류왕 2년 4월] 졸본(卒本)의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함. 
621년 음7월 [진평왕 43년 7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21년 음7월 [영류왕 4년 7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22년 [영류왕 5년] 당나라에 사신 보냄. 
622년 [영류왕 5년] 수나라 포로를 돌려보냄. 
623년 음12월 [영류왕 6년 12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24년 음2월 [영류왕 7년 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역서(曆書)를 구함.  
624년 음3월 [진평왕 46년 : 영류왕 7년 : 무왕 25년 3월] 당나라가 신라, 고구려, 백제 왕들에게 관작 
624년 음12월 [영류왕 7년 12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25년 음1월 7일 [추고천황 33년 1월 7일] 승려 혜관(惠灌) 파견, 승정에 임명함. 
625년 [영류왕 8년] 당나라에서 불교와 노자의 교법을 배워옴. 
626년 [영류왕 9년] 당나라 사신이 와서 삼국의 화해를 권유함. 
628년 음9월 [영류왕 11년 9월] 당나라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냄. 
629년 음8월 [진평왕 51년 : 영류왕 12년 8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격파함. 
629년 음9월 [진평왕 51년 : 영류왕 12년 : 무왕 30년 9월] 신라, 고구려, 백제 당나라에 사신 보냄. 
630년 음3월 1일 [서명천황 2년 3월 1일] 고구려가 대사(大使) 연자발(宴子拔)과 소사 
630년 음3월 [서명천황 2년 3월] 백제가 대사(大使) 은솔(恩率) 소자(小子)  
631년 음2월 [영류왕 14년 2월] 천리장성 수축함. 
631년 [영류왕 14년] 당나라, 고구려가 전승을 기념 
638년 음10월 [영류왕 21년 10월]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함. 
640년 음2월 [영류왕 23년 2월] 왕자 환권(換券)을 당나라에 보냄. 
641년 [영류왕 24년] 당나라 사신이 옴. 
642년 음1월 29일 [영류왕 24년 1월 29일] 당나라에 사신 보냄. 
642년 음2월 6일 [황극천황 1년 2월 6일] 고구려 사신이 난파에 도착함. 
642년 음10월 [보장왕 1년 10월] 연개소문(淵蓋蘇文),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 

영양왕
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개인적 성품이나 행적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삼국사기》를 통하여 그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자취만을 엿볼 수 있다.
 

왕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아울러,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영류왕 5)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척 하였지만,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격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하여(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나갔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그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에 의하여 몸이 토막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과 연개소문간의 알력의 원인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
이 장애가 되었던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弘植,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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