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111 

<52>당군의 탐색전
회원진서 도발하고 唐 성동격서<동쪽서 소리를 내고 서쪽서 적을 친다는 뜻> 몰래 요하를 건넜다
2012.01.11

요하 부근의 늪지대인 요택의 현재 모습. 644년부터 645년까지 당군은 두 차례에 걸쳐 이곳을 통과하는 소규모 정찰작전을 전개했다. 고구려는 당군이 이곳을 통과해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 회원진과 요동성 부근에 방어력을 집중했다.

644년 7월 23일 요동 정찰을 위한 선발대 파견 명령이 떨어졌다. 현 요령성 조양시에 위치한 당나라 영주도독부의 도독 장검(張儉)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다. 그냥 정찰대가 아니었다. 전초전을 치러 적의 전력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첫 싸움의 희생타가 되기 쉬운 실험용 병력이었다. ‘자치통감’은 “영주도독 장검 등을 파견해 유주(幽州, 북경) 영주 두 도독의 병사와 거란ㆍ해ㆍ말갈 족속들을 인솔해 먼저 요동을 공격, 고구려의 군세가 얼마나 되는지 관찰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영주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해도 장검은 자신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지원 없이 단독으로 요택을 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넘어가더라도 사나운 고구려 군대를 만나면 전멸을 의미한다. 장검은 도독부의 중국인 병사들과 거란ㆍ말갈ㆍ해 수령들이 이끄는 병력들과 함께 조양을 떠났다. 그곳을 벗어나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허허벌판이었다. 요서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완충지대였다. 양국 간의 긴장이 팽팽한 시기 그곳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각지에 잠복하고 있었다.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위험지대였다. 

장검은 직선으로 행군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둘러 갔다. 목표는 현재의 북진시(北鎭市) 남쪽 태안현(台安縣)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회원진(懷遠鎭) 부근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요하의 부근에 도착했다. 그의 앞에 광활한 소택지가 있었다. 남북 길이가 약 300리, 동서 너비는 200리의 요택(遼澤)은 아득히 넓은 갈대 평원이었다. 늪지로 된 평원에 거미줄 같은 하천망이 밀집해 있고, 버드나무와 수초들이 무수히 자라는 진펄이었다. 종횡으로 뻗어 나간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에는 유일한 길이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 군인들이 군사용으로 만들어 놓은 좁은 길이었다. 길목마다 함정이 있었고, 고구려 군인들이 매복하고 있을 터였다. 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장검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함께 온 거란과 해 그리고 말갈 수령들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갈대가 무성한 늪지에서 수령들이 이끄는 기병은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남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그가 도착한 것을 감지한 고구려 병사들이 벼르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는 앞서 영주를 침공한 고구려군 수천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장검은 무서워 요택을 건널 수 없었다. 장검은 장안에 파발을 띄워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는 상황을 당 태종에게 보고했다. 당시 상황을 ‘신당서’ 장검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종이 장차 요동을 정벌하려고 장검을 시켜서 번병(蕃兵)을 거느리고 먼저 나아가도록 하니, 장검이 각지를 돌아서 요서에 도착했으나 강(요수)이 넘쳐 오랫동안 건너지 못했다. 황제는 장검이 적을 두려워하고 무기력하다고 생각해 소환했다.”

그 와중에 9월 25일 연개소문이 파견한 고구려의 사절단이 장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당량의 백금(platinum)을 들고 왔다. 당과 전쟁을 피해보려던 연개소문의 마지막 비책이었다. 막대한 양의 백금이었을 것이다. 이미 전쟁을 결정한 당 조정은 백금을 거부했다. 당 태종은 사신들을 불러 말했다. “영류왕을 섬긴 신하들인 너희가 그를 죽이고 집권한 연개소문을 위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 죄가 크다.” 사절단은 수사기관인 대리시(大理寺)에 넘겨져 감금됐다. 고구려에서 장안으로 오면서 당군의 이동 경로와 당의 현지 상황을 모두 목격한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10월 14일 당 태종은 동쪽 낙양으로 향했다. 11월 2일 낙양에 도착한 그는 요택에서 온 장검을 만났다. 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들어가지 못한 장검은 면피를 하기 위해 요택에 대한 상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자치통감’에는 “지형의 험한 곳과 물이나 풀이 좋고 나쁜 것을 갖춰 진술하자 황상이 기뻐했다”고 기록돼 있다. 1125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북송(北宋)의 허항종(許亢宗)은 그의 ‘봉사행정록’에서 요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을과 여름철에 모기떼가 욱실거려 밤이나 낮이나 소와 말이 이곳을 지나지 못했다. 행인은 저마다 두껍게 옷을 입고 가슴과 배를 또 옷으로 둘러싸야 했다. 앉아서 숙대를 태워 연기를 피우니 좀 괜찮았다.”  명나라 말기의 기록에도 “수해가 많아 역참(驛堡)과 돈대를 빼놓고는 인가가 아주 드물어 사방으로 바라보면 연기 나는 곳이라곤 없는데 오로지 갈대들이 바람에 서로 비비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고 하고 있다. 3세기 삼국지(三國志)시대에 요택 동남부의 험독현과 방현이 폐기된 후 19세기 청나라 말기 대안현이 설립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요택 지역에는 현과 주(州)가 없었다. 줄곧 사람들에게 포기된 그냥 황량한 지대였다. 

645년 2월께 당 태종의 사촌동생 강하왕 도종(道宗)이 요택을 건너 정찰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도하지점은 장검이 건너지 못했던 회원진 부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도종전)를 보면 도종은 기병으로 이루어지 100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작전지역으로 향했다. 20일 만에 돌아올 것을 기약했다. 병력 수가 적어 그들은 요택을 지나갈 때 고구려에 발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요택의 지세와 고구려 군부대의 배치를 기록했다. 귀환하려던 차에 고구려군에 발각돼 퇴로가 차단됐다. 추격전이 시작됐고, 소동이 벌어졌다. 요동에 당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이 전 고구려에 퍼졌고, 고구려 수뇌부의 귀에도 들어갔다. 도종 일행은 구사일생 끝에 요택의 사잇길로 빠져나와 약속한 기일에 귀환했다. 

회원진은 요동성(遼東城)에서 요하를 건너 바로 요서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요동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33년 전 수 양제도 회원진 부근을 돌파해 요동성으로 쳐들어왔다. 그곳에 대한 2회에 걸친 도발은 고구려의 당군 접근로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거기다 645년 4월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주력이 회원진으로 온다는 정보를 고구려 측이 입수했다. 고구려는 회원진과 요동성 부근에 방대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당 태종과 이세적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요하 도하작전의 비밀에 대해서는 요택과 요동을 정찰했던 장검도 이도종도 몰랐다. 이세적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다른 곳에서 요하를 건넜다. 잘못된 접근로 판단을 한 고구려에 치명적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당나라 내부서도 ‘승산 없다’ 전쟁 반대 주장 

644년 11월 낙양에 도착한 당 태종은 전에 수나라대 고구려 전선에 종군한 경험이 있던 퇴역 장군 정원숙(鄭元璹)을 불러서 물었다. 그의 대답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요동까지 길은 멀고 양식의 운반도 어렵습니다. 고구려인(원문은 동이)들은 성(城)을 잘 지켜 급히 이를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늙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고구려에서 수많은 부하를 잃은 사람의 충언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날은 수나라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오.” 12월 당 태종이 떠난 낙양에 남아 수도권 경비를 담당하던 우위대장군 이대량이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당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군을 철회하라는 서신을 남겼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의 고구려 침공 결정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티벳의 승?칸포와 파미르 고원 너머의 서돌궐 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644년 9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국가인 언기(焉耆ㆍ신강성 언기현)를 서돌궐이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구려와의 전쟁 패배와 이어진 내란으로 수나라가 멸망한 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은 그것이 당나라에도 재현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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