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현토성 함락
고구려, 믿었던 천리장성 ‘무용지물’ 
2012.01.25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35㎞ 떨어진 만당향(滿黨鄕)에 위치한 석대자(石臺子) 산성이다. 고구려 산성으로 645년 4월 당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군의 주력이 천리장성을 북동쪽으로 우회해 돌파했다는 소문이 동아시아 전 지역에 퍼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고민에 잠겼다. 이제 당 태종 직속 6군(六軍)과 보급부대들이 요하를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14년에 걸쳐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투입해 요하를 따라 건설한 천리장성은 정작 당군이 밀려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고구려 지배층으로 하여금 그 거대한 담장을 만들게 했다. 연개소문 자신이 집권하기 이전 고구려 위정자들은 천리장성 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하면서 어떠한 적이라도 이 방어선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천리장성이 과거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 위주의 수나라 군대를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데 있었다. 돌궐과 그 외 이민족 기병이 주력이었던 당나라 군대는 속도로 승부했다. 연개소문은 과거 위정자들에게 화가 치밀었고, 당군에 속아 접근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으리라. 

645년 4월 1일 통정진을 통해 요하를 도하한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의 첫 번째 희생물은 유서 깊은 현토성이었다. 요하를 건너서 동쪽 고구려로 쳐들어온 군대들은 언제나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현토는 한족(漢族)의 동방 침략과 지배의 거점이기도 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B.C. 403~B.C. 221) 연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건축한 요새에서 출발, 한무제가 조선을 멸한 후 한사군을 세우고 현토군의 치소가 된 후 확장 수축된 후 근 800년이 흘렀다. 

돌연히 출현한 당나라 대군의 위용에 놀란 현토성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다. 성의 함락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이렇게 짐작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0만 필 이상의 말이 일으키는 먼지와 말발굽 진동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성은 금세 돌궐기병들에게 포위돼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석포에서 쏟아지는 돌 세례를 받아 성벽과 건물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절규가 흘러나왔다. 성벽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도 당 보병들이 기세등등하게 방패 들고 다가왔으리라. 충차가 현토성의 성문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당군이 성벽으로 기어 올라갔을 것이다. 성문이 깨지면서 당군은 개미떼처럼 몰려갔고 대항하던 고구려 병사들이 소모되기 시작했으며, 성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4월 5일 요동도대총관 이세적이 현토성을 접수한 그 시간에 부대총관 강하왕 이도종과 그의 군대 수천 명이 신성 앞에 도착했다. 신성은 요령성 무순(無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추정된다. ‘고이산’은 고려산이라는 뜻이다. 신성은 천산산맥 줄기가 요동평야와 맞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70~140m의 여러 야산을 하나로 묶은 산성으로 동성·서성·남성이 있다. 3개의 성으로 방어망이 중첩돼 있다. 가장 높은 장군봉은 평원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결코 낮아 보이지 않는다. 올라가 보면 전망이 탁 트여 있어 접근하는 적들을 아주 멀리서도 관측할 수 있다. 그 광활한 평원에서 생산된 곡물들로 성의 창고가 채워졌을 것이다. 모체를 이루는 동성은 이 장군봉을 중심으로 좌우로 뻗어 내린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가운데 비교적 넓은 완만한 경사 면이 있어 주민과 군사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좌우 능선을 따라 성벽이 뻗어 내려와 한곳으로 모아지는 지점에 평지와 잇닿아 있는데 이곳이 성의 주 출입구다. 성에는 물이 풍부하다. 남성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남쪽에 혼하, 동쪽에는 그 지류인 무서하가 있어 해자 역할을 했다. 요서에서 고구려로 쳐들어오는 적군은 요하 중류를 건너 심양을 지나 이곳에서 곧장 집안으로 갈 수 있다. 고구려도 이곳을 거점으로 서북쪽의 넓은 평원지대로 나갈 수 있다. 

이도종은 절충도위 조삼량을 시켜 신성 성문 앞으로 가서 유세하도록 했다. 고작 기병 10명이었다. 아마도 조삼량은 신성 성주에게 같은 수의 기병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결해 보자고 한 것 같다. 신성에서도 같은 수의 기병을 내보내 그들과 대결할 터였다. 대응하면 소규모의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승패에 따라 양군의 사기에 크게 영향을 준다. 이미 현토성이 떨어졌다는 비보가 전해진 상황이었다. 고구려군은 불리한 상태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성문을 닫고 지켰다. 무엇보다 당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느라 신성 사람들은 바빴다. 

당군이 근처에 있던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기 시작한 4월 15일 이전까지 10일 동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신성이 고립됐다고 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성은 너무나 덩치가 커 공략이 여의치 않았다. 전력을 집중 투여해 함락시킨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전쟁 전체에 차질을 가져다줄 것이 뻔했다. 이세적은 신성을 건너뛰기로 했다. 대신 신성에 있는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그 앞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 견제했다. 그리고 좀 더 만만한 개모성에 병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요하를 이제 막 건너온 당군에게는 일단 여장을 풀어 놓을 집과 그 창고에 있는 식량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세적의 전략을 당시 신성의 고구려 지휘부가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신성에서 개모성으로 가는 길에는 산 같은 산이 안보이고, 광활한 들판과 언덕 정도의 야산이 눈에 띌 뿐이다. 그러다 산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 나타난다. 무순에 위치한 신성쪽에서 진공해 오는 적을 막을 방어시설이 될 만한 지형은 이곳밖에 없다. 신성과 개모성은 요하 북방에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방어 거점이었다. 4월 15일 이세적은 돌궐기병들을 시켜 개모성 주변을 에워싸게 했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기병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로써 개모성은 외부로부터 원천 봉쇄됐다. 수만 명의 병사와 성민들은 그들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당시의  첩보전

장검은 당나라의 대고구려 전선 최전방 영주(조양) 사령관이었다. 휘하에는 그의 사령부를 운영하는 중국인 행정병과 본부 직속의 부대들이 있었고, 현지인들로 구성된 첩자단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주로 고구려를 넘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으리라.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과 정권 장악에 대해 당조정에 최초로 보고한 것도 장검이었다.

644년 11월 낙양에서 당 태종을 만난 장검이 요택을 넘어 고구려에 들어가지 않고도 그 지리와 고구려부대 배치에 대해 보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첩보활동 때문이었다. 스파이는 스파이를 알아 봤다. 장검이 영주에 돌아온 직후인 645년 초반 고구려 첩자 한 명이 체포됐다. ‘책부원구’ 장수부를 보면 체포된 고구려 첩자(候者)가 연개소문이 요동전선에 시찰을 온다는 사실을 자백했고, 장검이 이 정보를 믿고 출격했지만 연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요택을 사이에 두고 당과 고구려 사이에 치열한 첩보전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세적의 당군 주력이 회원진을 돌파해 요동성으로 진격한다는 거짓 정보도 영주에 암약하던 고구려 첩자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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