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215 

<57>비사성 상륙
연개소문 ‘당 황제 정조준’ 병력 재배치 
2012.02.15
 
645년 4월 말 달이 없는 어두운 밤 만조의 시간에 당의 수군이 대련만과 금주만 부근에 나타났다. 장량의 부하 정명진(程名振)이 이끄는 함대였다. 500척의 전함에 4만 명의 병력이 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상륙을 감행할 전투병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명진은 상륙 직전에 해안에서 고구려의 함대와 일대 격전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단단히 준비했다. 하지만 고구려 함대는 출동하지 않았다. 항만은 텅 비어 있었다. 상륙 직전에 고구려 기병이 나타나 저지할 것이라 예상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뭔가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항만 어귀에 배들이 닿았고, 각 배들 앞에는 신속한 상륙을 돕기 위해 버드나무로 만든 길고 큰 카펫이 깔렸다. 어둠 속에서 2만 명 이상이 상륙했지만 고구려군의 어떤 저항도 없었다. 상륙 후 정명진은 고구려가 기존의 병력 배치를 전면 재조정한 것을 알았다. 

절벽 위의 고구려 비사성 장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그 너머에 당군이 주둔했던 오호도(북황성도)가 있다.

4월 중순에 고구려 수뇌부는 요동성 부근에 집중된 전력 일부를 북쪽으로 올려 이세적의 당육군 주력에 대항하려하고 있었고, 또 일부 병력을 요하 입구로 남하시켜 건안성 부근에 육박한 장검의 기병단을 저지하려 했다. 이것 또한 당군이 기획한 작전에 고구려군이 말려든 것이었다. 이로써 황제가 회원진 부근에서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접근하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비사성에 있던 기병과 해군력도 고구려의 병력 배치 재조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645년 4월 초순 장검이 이끄는 거란ㆍ말갈ㆍ해족 기병이 건안성 부근에 나타나 수천의 고구려 군인을 죽였다는 소식이 비사성에 들려왔다. 요하 하구의 최대 방어 거점인 건안성이 고립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물론 발해만과 황해 방면 모두를 굽어볼 수 있는 비사성은 요동반도 연안로를 이용한 해상교통 장악에 최적의 요새였고, 그 중요도는 매우 높았다. 하지만 4월 말 당태종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요도에 있어 요동성과 가까운 건안성의 순위가 올라갔다. 요하 입구에 위치한 건안성이 당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당군은 그 강을 이용해 정기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황제의 등장은 당시 고구려의 방어작전은 물론 당군의 공격작전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초 황제가 고구려 땅에 도착한 직후 치밀하게 기획된 당군의 작전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존재 때문에 당군은 작전 수행의 신축성이 죽었고, 반대로 고구려는 황제가 있는 곳만 정조준하면 됐다. 신속한 결정을 위해 황제가 직접 종군했다. 하지만 황제는 최대의 짐이었다. 모든 작전에서 그의 안전이 최우선순위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나중에 상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안시성 앞에 나타난 당태종과 그의 군대를 치기 위해 연개소문이 ‘15만’ 대군을 투입한 것은 황제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보았던 그의 예리한 결단력을 보여준다. 

고구려에도 골치 아픈 문제는 있었다. 요동성에 바로 인접한 안시성의 성주는 연개소문과 적대적이었다. 결코 그는 평양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요동성이나 건안성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것은 비사성의 병력 차출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4월 말 그 중요한 시점에 비사성에서 기병 전력을 빼내 건안성을 지원하라는 평양의 지시가 하달됐을 것으로 보인다. 

비사성에 있는 현지 지휘관들은 갈등했으리라. 지시의 본질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기병력이 없는 것은 비사성 방어에 치명적이었다. 당 수군이 필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그믐날 상륙할 것이다. 기병이 없으면 그들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다. 비사성 주변에 당나라 군대가 상륙할 수 있는 곳이 많고, 넓고 광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군인은 상부의 지시를 어길 수 없다. 비사성 주변에 있던 고구려 기병대가 건안성으로 향했을 것이다. 바다에서 적 함대를 막아낼 수 있는 기능도 사라졌다. 이미 비사성 주변 항만에 있던 함대들도 압록강 부근으로 갔다. 평양의 수뇌부는 분산된 고구려의 해군 전력을 비사성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압록강 부근에 집중시켜 전체적인 수적 열세를 만회하려 했다.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의 지휘관들은 비사성이 당군의 수중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미 계산에 놓고 있었으리라. 

당 수군이 비사성을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필시 당태종이 요하 동쪽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압록강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할 것이다. 본래 당 수군은 모든 전력을 압록강 입구에 집중시켜 그곳에 있는 고구려 해군을 전멸시켜야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황제가 있는 요하 부근에 전력을 집중시킬 것이 거의 확실하며, 결국 당 수군도 요하 하구의 건안성으로 향해야 한다. 

당군이 방치된 비사성 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가운데 부근 낮은 언덕 초소에서 봉수의 불길이 올랐고, 배후 400m 이상의 기암 절벽 위에 있는 비사성의 고구려 군대가 당군의 상륙을 감지하고 대비태세에 들어갔으리라. 비사성에서는 성문을 열고 나와 상륙한 당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로지 문을 걸어 잠그고 험한 지형에 의지해 농성밖에 할 수 없었다. 정명진은 함대가 집결된 항만 근처에 임시 기지를 설치하고, 함대 보호를 위한 초소를 세우고 병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륙한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 병력을 재정비한 후 비사성 공격을 위한 작전 수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직전인 4월 26일 이세적이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으로 남하하고 있다. 빨리 좋은 항만들을 보유하고 있는 비사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그래야 산동반도에 야적된 거대한 군수물자를 이곳 금주만과 대련항으로 옮길 수 있고, 비사성을 중간보급기지로 삼아 요하 입구인 건안성 근처에 있는 장검의 군대에 보급할 수 있다. 문제는 비사성이 너무나 험한 지형의 요새라는 데 있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그 성(비사성)은 사면을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고 오직 서문(西門)으로만 올라갈 수 있었다.” 비사성은 동남북쪽이 모두 절벽이었다. 오직 서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만만치 않았다.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함락할 수 없는 요새였다. 

현장에서 본 비사성-산등성이 따라 축조 가파른 비탈길 ‘상상 이상’

비사성은 대흑산 복판과 남측 두 산봉우리 사이의 협곡을 에워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너비는 3.3m, 높이는 3~5m, 둘레는 약 5000m다.

대련 시내에서 비사성은 대흑산풍경구에 위치해 있다. 풍경구 입구에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작은 마을과 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내려 작은 봉고차를 타고 비사성의 서문으로 갈 수 있다. 상상치도 못하는 가파른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야 하는데 경사도가 심하고 위태롭기까지 하다. 과거에는 기사에게 웃돈을 더 주지 않으면 중간에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오르다가 반갑게 눈에 띄는 것이 비사성 성문이다. 이것을 보면서 다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 안에 들어서면 길쭉한 확 트인 공터가 나타나는데, 널다란 포장길이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장대 터까지 이어져 있다. 절벽 위에 있는 고구려의 장대 터는 3000년 전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단대(壇臺)였다. 그곳에서 금주 시내와 멀리 발해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질 무렵에 서쪽 수평선에서 붉게 타오르는 바다에는 배들이 줄을 지어 돌아온다. 그 옛날, 고구려인들은 이곳에서 수평선 너머 적군 함대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결전을 준비했다.

지금 비사성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정확히 1367년 전 이곳에는 창검이 번쩍이는 가운데 군기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고각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결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짐을 지고 끊임없이 서쪽 비탈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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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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