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314 

<61>요동성의 해자
야금야금 장애물 제거 唐 맹사<猛士:용감한 전투공병> 슬금슬금 진군가 준비
2012.03.14

정예병력 공성기구도 성 서쪽에서 공격 유목민 기병은 성 남쪽에 주둔 기동타격 

이세적·장검 등이 유목민 기병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던 요동성 남쪽 성벽과 그 앞 해자의 모습. 왼쪽 광우사(廣佑寺) 쪽이 옛 성벽이었다.

645년 5월 10일 당 태종과 그의 군대가 요동성 부근에 도착했다. 현재 요양시 서남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 마수산(馬首山)에 당 태종은 진지를 차렸다. 당 태종과 그의 직속 병력 6만 명을 위한 병영이 들어선 것이다. 산을 중심으로 정교한 목책이 단조로운 미로와 같이 이중삼중으로 둘러쳐졌고,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당 태종의 지휘소가 위치해 있었으리라.

진영이 완성되자 당 태종은 병사들을 도열시켜 놓았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상벌을 내렸다. 중국 황제가 고구려 땅에서 군령을 집행하는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황제의 사촌 동생인 이도종의 이름이 거명됐다. 어려운 상황에서 고구려 군대를 저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치하와 함께 상을 받았다. 다음으로 마문거의 이름이 거명됐다. 시골의 예비군 중대장 비슷한 위치에 있던 그가 황제의 앞으로 불려갔다. 중랑장(中郞將)이라는 무관직이 수여됐다. 무명의 무관이 갑자기 전방 사단의 고위 영관급 장교가 된 셈이다. ‘자치통감’은 순서를 뛰어넘는 승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문예(張門乂)의 이름이 거명됐다. 그의 눈동자와 머리는 풀려 있었고, 패전 후 감금돼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포박된 상태로 황제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고구려에 와서 첫 패배의 치욕을 안긴 장군이었다. 그의 무능으로 셀 수도 없는 병사들이 이국땅에서 한 순간에 죽었다. 요동성 함락을 위한 인신공양의 재물이 돼 그의 피가 땅에 뿌려진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멀리 요동성에서 고구려인들이 뻔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마수산에서 칼날이 번쩍였다.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본 동료 장군들은 자신의 목을 만졌으리라. 패배하면 누구도 예외가 없다. 상벌(賞罰)의식을 통해 당 태종은 군기를 잡았다. 

전투 직전 분위기를 다졌지만 공격은 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전투보다 삽질이 먼저였다. 해자를 메우기 위해 막대한 막일이 필요했다. 요동성 공방전만큼 공병력이 전장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것도 없었다. 요동성은 평지성이라 산성보다 공성기 사용이 용이했다. 성벽이 모두 인공적으로 다듬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투석기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기 쉽고, 한번 파손되면 보완도 어려웠다. 대신 요동성의 성벽 바로 아래에는 깊고 넓은 해자가 있었다. 그것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은 태자하·혼하 등 29갈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그 지역의 풍부한 물 자원을 무기로 사용했다. 당군이 오기 전에 해자 앞의 땅을 아주 넓게 파고 강의 물길을 그곳으로 돌려 해자를 끝없이 팽창시켰다. 황제가 접근해 매립하는 일을 거들 정도로 성벽과 거리가 먼 광대한 해자였다.

‘책부원구’는 태종이 도착했을 때 태자하의 지류인 양수(梁水)가 요동성을 환류(還流)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현재 태자하는 요양시 동남쪽에서 방향을 꺾어 시가지 동쪽을 따라 북류하다가 동북쪽 근교에서 다시 방향을 꺾어 서류하고 있다. 지대가 낮은 요동성은 홍수가 져도 해자가 넓어졌다. 서기 238년 조위군(曺魏軍)이 요동성에 중심지를 두고 있던 지방정권 공손씨(公孫氏)를 공격하던 당시의 전황을 기록한 ‘자치통감’을 보자. “가을 7월에 장맛비가 내리니 요수의 물이 불어나 배를 운항해 요하입구에서 지름길로 성(요동성에 해당) 아래까지 이르렀다. 비는 한 달을 넘게 내렸는데도 그치지 않았고, 평지에도 물이 여러 자나 찼다.” 

당 태종은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마수산을 나와 요동성으로 향했다. 물바다가 된 성 앞에 줄지은 병사들이 등에 흙을 지고 날라 메우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큰 돌을 쏘는 석포의 사정거리 밖까지 물을 끌어 들였다. 그 광활한 곳을 일일이 흙으로 메우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당 태종이 흙을 많이 짊어진 병사의 그것을 일부 받아내 자신의 말 위에 올리고 흙을 날랐다. 그러자 따라온 병사들은 다투어 흙을 져다 해자에 뿌렸다. 그 순간에서도 투르키스탄에서 몽골리아·북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곳에서 온 온갖 종족들로 구성된 유목민 기병들이 요동성 주변 외곽에 배치돼 고구려 기병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윽고 요동성 앞 광활한 지역의 물 웅덩이가 매립됐다. 하지만 고구려군 활의 사정거리가 미치는 성벽과 가까운 해자는 아직 온존했다. 성 밑 해자를 매립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 태종이 요동성 공략을 위해 각 장군들에게 역할분담을 시킨 소중한 기록의 일부가 ‘전당문’에 실린 당시 황제의 조서(克高麗遼東城詔)로 남아 있다. 태종은 이세적·장검(張劍)에게 명하여 정예군과 유목민으로 이뤄진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성의 남쪽을 지키게 했다. 기병으로 성벽을 공략할 수는 없다. 그들의 임무는 고구려 구원군이 왔을 때 즉각 요격하는 기동타격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군의 총관 장사귀(張士貴)에게 명하여 관중(關中)의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했다. 공성기를 이끌고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중국인 보병들이었다. 부대총관 이도종이 관중 출신의 경기(勁騎)병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호위했다. 성문을 열고 나온 고구려 기병이 중국인 보병들을 도살할 수도 있었다. 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는 안팎으로 보병에 버금가는 많은 기병의 수가 필요했다. 

전군(前軍) 대총관 유홍기(劉弘基)와 휘하 공병감(工兵監)들에게 맹사(猛士), 즉 용감한 병사들이 배정됐다. 그들은 성벽 바로 아래의 해자를 메우는 작업을 할 터였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전투공병(戰鬪工兵)들이었다. 그들은 보병이면 누구나 할 수도 있는 일반 공병들과 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병사들을 태운 사다리차나, 성문과 누각을 때려 부수는 여러 장비들이 성벽에 접근하려면 일방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매립해야 했다. 수많은 화살이 그들 머리 위로 내려 꽂혔고, 당군의 석투기에 발사된 돌이 성벽을 치면서 부서진 돌과 나무기둥들이 쏟아졌을 것이다. 지옥의 공병대였다. 

고구려군들은 누구보다 ‘맹사’들을 1차적으로 저격했다. 그들의 임무가 끝나면 당나라 보병들을 가득 실은 사다리차와 성문을 때려 부수는 충차가 성벽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공성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해자를 지켜내야 했다. 

공성기의 전시장 요동성 

요동성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에서 드문 거대한 평지성이었다. 중국 군대가 이곳을 공격할 때 전투양상은 광활한 평원인 중국의 그것과 비슷했다. 612~613년 요동성 전투에 수양제는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공성기를 동원했다. 

위는 말리지 않은 소가죽(生牛皮)을 덮고, 아래는 긴 사다리가 붙어 있어 그 위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게 만든 비루(飛樓), 앞부분을 철로 씌운 충격용 나무를 수레에 달아 성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바퀴 6개를 달고 그 위에 튼튼하고 긴 사다리 2개를 기축(機軸)으로 이어서 접었다 펼 수 있는 운제(雲梯),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의 바퀴 달린 누각에 충차의 나무기둥을 매달아 높은 성루를 부수는 충제(衝梯) 등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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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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