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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1 : 고구려-전연의 전쟁 1

우리는 누구인가 2 : 고구려-전연의 전쟁 2 - 송진완  http://tadream.tistory.com/4451
우리는 누구인가 3 : 선비족은 누구인가? - 송진완  http://tadream.tistory.com/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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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42년(고구려 고국원왕 12년), 전연(前燕)의 장군인 모용한은 고구려를 침공하자고 건의한다.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다음에 우문씨(宇文氏. 모용씨와 마찬가지로 유목민족 집단으로서 훗날 수나라의 지배층이 된다 - 옮긴이)를 멸망시키고, 그후에 중국을 손에 넣자고 청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2년 조 

전연 왕 모용황이 그 간청에 뭐라고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사 바로 밑에 전연군이 고구려로 들여가는 기사가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부정적인 답변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이 때 모용한은 고구려 침공을 먼저 제안한 사람답게 고구려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생각해낸다. 

“고구려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여러 사람이 북쪽 길로 가자고 했다. 모용한은 말했다. 

‘적국은 보통 심정으로서 이를 헤아려 반드시 연나라 군사가 북쪽으로부터 오리라 여겨, 틀림없이 북쪽은 중히 여기고 남쪽을 소흘히 할 것입니다. 그러니 왕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서 남쪽 길로부터 이를 쳐서 그들의 뜻밖에 진출하게 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것도 못됩니다. 또 따로 군사 일부분을 보내어 북쪽 길로 나간다면 비록 차질이 있더라도 그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지면 팔다리는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용황은 그말에 따랐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2년 조 

이 작전은 적중해서, 기존의 작전대로 진을 짜고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은 처절하게 궤멸당하고, 고구려는 왕이 달아나고 왕비와 왕모가 붙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고구려왕은 아우 무(武)를 시켜 날랜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스스로 파리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막았다. 모용한 등은 먼저 이르러 고구려군과 싸웠고, 모용황이 많은 군사로 뒤를 이어 치므로 우리 군사는 크게 패전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는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목베자 많은 군사들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드디어 환도성까지 쳐들어왔으므로, 왕은 단기(單騎)로 달려(홀로 말을 타고 달려 - 옮긴이)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적의 장군 모여니(慕輿埿)는 왕모 주씨(周氏)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2년 조 

“그들은 고구려 후방을 초토화했으나 수많은 연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못했다. 군대를 따라갔던 그의 가족들 역시 많은 숫자가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김상 교수. 이하 존칭 생략).” 

(보충 설명 : “유목민족에게 왕이 친정親征[몸소 정복함]하는 것은 국가가 이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가 가고 뒤에 가족들이 따라간다[김상].” 전연은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으므로 이 법칙을 충실하게 따랐을 것이다) 

“이 때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싸워 모두 패전해서,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하고, 사자를 보내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2년 조 

“(모용황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내어 싣고, 그 창고에 있는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는 남녀 5만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사르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는 돌아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2년 조 

“그런데 이상한 것이 바로 고구려와 연나라 사이의 정전협정이다. 고구려는 주로 민간인을 포로로 잡혔고, 군대가 돌아가지 못한 쪽은 연나라가 많은데, 포로 송환을 요구하는 것은 고구려이며, 연나라는 포로송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국원왕이 연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 포로문제 때문이다(김상).” 

“봄 2월에 왕은 그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어 신하라 일컫고 조회하고, 진귀한 물건 1천여 가지를 바치게 했다. 연나라 왕 모용황은 이에 그의 아버지의 시체는 돌려보냈으나, 아직 그 어머니는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3년(서기 343년) 조
 
“자기들의 군대가 대규모로 귀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나라가 포로송환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송환을 요구할 포로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거의 다 죽었거나 거의 다 도망갔거나 둘 중 하나인데, 북방 유목민족은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후자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김상).” 

▷ 사라진 전연 군대의 행방 

비록『삼국사기』에는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적혀있지만, “『삼국사기』의 모용황 침공기사는 중국의 사서인『자치통감』의 기록을 다소 축략해 전재한 것(이병도,『삼국사기 역주』, 413쪽)”이고 “『자치통감』은 물론 모용황 측이 전한 기록을 담았을 것(장한식 기자. 이하 존칭 생략)”이며 전연군은 “북로로 진군한 1만 5천 명의 병력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장한식)”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전사했다(皆敗沒)’는 짧은 기록만을 남긴 것(장한식)”이라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북로로 진격한 모용씨 1만 5천 병력의 행방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고 하겠다(장한식).”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약 10년 후 선비족 특유의 화려한 기마민족 문화가 경주 일대에 펼쳐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그 김씨신라의 시작이다. 문화의 교류는 사람의 교류에 의한 것이 가장 크고 확실하다. 백제사에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동해안을 따라 들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김상).” 백두대간(태백산맥) 동쪽(강원도 영동지방)은 “江도 거의 없어서 기마민족에게는 서해안보다 훨씬 유리하다(김상).” (동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해변 루트는 고대로부터 길이 열려 있었는데, 이는 “북쪽의 함경도 옹기와 남쪽의 부산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서로 유사한 데서도 알 수 있다[장한식].”) 

“추측컨대 고무 왕자가 지휘하는 고구려 5만 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북로 침공 별동대는 우선은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모용황의 군대와 합치려고 방향을 남으로 틀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제지를 받아 본진과 합류하는 데 실패하고는 계속 추격을 받았을 것이다.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별동대는 고구려 땅을 횡단해서 달아나기에 바빴다(장한식).” 동해안도 안전지대는 아니었기에, 이들은 동해를 왼쪽으로 끼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삼한백제의 속국인(사실상 삼한백제의 일부분인) 신라에 도착했고 이 때 신라의 왕인 흘해이사금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경상북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이후 경상북도에 유목국가가 세워지는 기틀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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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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