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024&kindSeq=1&writeDateChk=20120502

<67>백암성주의 배신
혈투 벌이는 부하 등 뒤서 ‘투항 깃발’ 꽂다 
2012.05.02

기병전서 승리한 唐   공성기로 집중 공격


1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구려의 백암성 성벽은 의연히 남아 있다.

645년 5월 29일 막사에서 태종의 치료를 받은 계필하력은 허리에 압박붕대를 감고 다시 출정했다. 돌궐 기병과 고구려군 사이의 전투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투의 결과만 전할 뿐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은 이러하다. “계필하력은 더욱 분해져서 상처를 묶고 싸웠고, 쫓는 기병들도 분발해 쳐서 드디어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목을 벤 것이 1000여 급이었는데, 마침 어두워지자 그만두었다.” 당군은 저녁 무렵에 고구려 기병을 격퇴했다. 

성 외부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암성에 입성한 고돌발 휘하의 오골성 기병들이 곤란해졌다. 외부의 효과적인 지원이 없이는 성 내부의 기병은 힘을 쓰기 어렵다.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문을 열고 나가봐야 당군 화살에 표적이 될 뿐이었다. 

돌궐 기병이 고구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자 당군은 요동성에서 공성기를 분해해 갖고 올 수 있었다. 도착 후 공성기가 조립됐고, 먼저 석포가 백암성 서문 앞 좁은 60보 거리의 공간에 집중 배치됐다. 그 중화기 일차 목표는 비교적 분명했다. 서문 위에 거치된 고구려군의 강노들을 일단 무력화시켜야 했을 것이다. 

 본격적인 싸움이 다시 시작되기에 앞서 당태종이 병사들을 모아 놓고 한 선언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성을 얻게 되면 마땅히 사람과 물자를 모두 전사(戰士)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 같은 기록에서 이적(李勣)의 표현대로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그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까닭은 포로와 물건을 획득하려 하고 탐내기 때문”이었다. 

당군은 규율이 철저한 군대였다. 앞서 계모성과 요동성을 함락했지만 개인적 약탈은 없었다. 그것은 군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641년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후군집과 설만균이 각각 재물과 여자를 횡령한 것이 들통 나서 수사기관의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태종의 사면으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후군집은 재상 진급이 좌절됐고, 설만균은 색마로 소문이 나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 

백암성에서 태종은 약탈을 공개적으로 허가했다. 그것은 아직 갈 길이 멀었던 당 태종의 마지막 카드였다. 약탈만큼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없다. 전쟁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당군에게 배설의 길이 열렸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적의 지휘 하에 백암성을 향한 공격이 시작됐다. 석포에서 돌을 쏟아냈다. 주로 고구려의 강노가 거치된 서문에 집중됐으리라. ‘책구원구’는 “충차가 때린 곳은 모두 부러지고 무너졌다(沖車撞之所向?潰). 돌이 날아가고 화살이 흘러 비처럼 성안에 쏟아졌다(飛石流矢雨集城中)”라고 한다. 

같은 책을 보면 당태종이 전투 장면을 보고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돌을 발사하니 별이 떨어지는 것보다 심하여(石發甚於星?), 망루가 헐어짐이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樓毁同於山壞). 적(고구려)들이 이미 심한 곤경에 이르렀으니(賊旣倒懸). 바야흐로 화란을 바꿀 것을 생각할 것이다(方思轉禍).”

백암성이 포위된 가운데 당군의 원거리 무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서쪽 방면의 성벽 위에 있는 고정된 시설물이 급속하게 회손돼 갔고, 성벽도 일부 무너졌다. 성 내부에 화재가 난 가운데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군의 기세도 거세졌다. 

6월 1일 당태종이 백암성 서북쪽에 나타났다. 수많은 깃발이 선명하게 나부끼는 가운데 황금빛이 나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호위무사들을 대동한 그의 행렬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전투 현장에 나타나자 당군은 보란 듯이 힘을 내 싸웠다. 이름만 들었던 천하의 당태종을 본 고구려군은 심리적으로 절망감이 들었으리라. 그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했겠는가. 

함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항복을 예약했던 백암성주 손벌음은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성이 끝까지 버텨도 배신이 들통 나 온전치 못할 것이고, 성이 함락돼 사로잡히면 자신은 약속을 번복한 죄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태종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지금 결정적 이적(利敵) 행위를 해야 했다. 

손벌음은 심복을 밀사로 보냈다. 황제에게 전한 그의 말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인은 항복하기를 원했지만 성 안에는 좇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성주들을 물갈이할 때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인사인 듯하다. 부하들은 생존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 성주는 자신의 무능을 알아버린 백암성의 현지 병력들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상관인 성주보다 백암성 성민공동체를 목숨처럼 여겼다. 하지만 일신만을 생각한 성주는 자신의 밀사를 통해 당태종에게 다시 항복을 청했다. ‘자치통감’은 태종의 대답을 이렇게 적고 있다. “황상은 당나라의 기치(旗幟)를 주면서 말했다.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성 위에 꽂으시오.” 

백암성의 고구려 병사들이 성벽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가운데 태종이 칼과 도끼를 던졌다. 그것을 신호로 손벌음은 당군의 깃발을 성 위에 계양했다. 성벽의 구역에서 각자 맡은 자리를 지키던 고구려 병사들이 그것을 보고 저항을 멈췄다. 

그들은 모두 당나라 군대가 백암성을 접수한 것으로 알았다. 가장 용감하게 성을 사수해야 하는 성주의 배신으로 백암성은 함락됐다. 목숨을 바쳐 성을 사수하다가 산화한 요동성주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부하들을 적에게 팔아넘긴 자의 이름은 기록에 남았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요격기’ 돌궐 기병

당태종은 종군한 돌궐인들에게 많은 배려를 했다. 그들은 인종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중국 한족 장군들과 병사들 입장에서 그들은 불과 15년 전만 해도 중국을 약탈하던 도적떼였다. 

그러나 돌궐 기병은 고구려전선에서 당군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농경민 출신 중국인 기병은 돌궐인들의 전투력을 태생적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가혹한 환경의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는 기예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 고정된 땅 위에서 무기를 다루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전투기로 보자면 고성능 요격기와 같은 존재였다. 중국인 병사들은 그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보급로를 지킬 수도 고구려의 요새들을 포위할 수도 그 요새를 때려 부수는 공성기를 운반할 수도 없었다. 

최고의 전력을 가진 돌궐 기병이 첫 전투에서 고구려 기병에게 패배했다. 당태종은 패전의 책임 소재를 따져봤자 실질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없었고, 사기만 저하시킬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패배한 돌궐인 기병대장 계필하력을 격려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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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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