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024&kindSeq=1&writeDateChk=20120509

<68>백암성의 선전전
당 태종, 입장 바꿔 약탈 금지한 이유는? 
2012.05.09

내부 분열 부추기기 위해 성 외부 출신 고구려 병력 석방

고구려 시대 서부 지방의 주요 방위성인 백암성이 멀리 보이고 있다.
 
645년 6월 1일 백암성 위에 당나라의 깃발이 걸렸다. 성주 손벌음의 항복을 받아준 당 태종은 약탈 금지 명령을 내렸다. 입성하는 당나라 병사들이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명령은 모든 법 위에 있었다. 백암성의 여자와 재물을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싸웠던 당나라 병사들이 허무해졌다. 앞서 군부의 수장 이세적과 그의 부하 지휘관들은 앞서 황제의 약탈 허락을 병사들에게 전한 바 있다. 갑자기 황제가 그것을 번복하자 그들은 중간에서 거짓말쟁이가 됐다. 그렇게 해서는 앞으로 전투에서 영이 서지 않는다. 이세적은 부하들과 함께 당 태종을 찾아갔다. 

당 태종은 화려한 깃발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항복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부의 수장 이세적과 휘하의 지휘관 수십 명이 태종 앞에 도착했다. 정연하게 한 쪽 다리를 꿇고 앉아 머리를 숙였다. 이세적이 대표로 말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이 비처럼 내리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까닭은 포로와 재물을 탐냈기 때문입니다. 성이 함락돼 가고 있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셔서 전사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십니까?” 

황제는 말에서 내려 부하들에게 예를 갖춰 말했다. ‘자치통감’은 황제의 부하들에 대한 정중한 사과였다고 전한다.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들을 멋대로 풀어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포로로 잡게 하는 일은 차마 허락하지 못하겠소. 장군의 휘하에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면 짐의 개인 창고(府庫)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내려 줄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하나의 성(城) 전체를 대속(代贖)해 주시오.” 

황제는 부하들에게 고개 숙여 사정을 해서 약속어음을 끊어주고 백암성 전체를 샀다. 병사들은 귀국 후 황제의 창고에서 예상약탈품에 맞먹는 물자를 돈으로 지급받을 터였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세계를 향한 황제의 정치와 당나라 군대의 근간을 이루는 부병제의 성격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645년 그해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은 주변의 모든 나라 군주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수나라가 고구려와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다가 내란을 불렀고, 끝내 멸망하지 않았는가. 근 400년 만에 하나로 재통일된 중국이 박살이 나 군웅들의 싸움터가 됐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거대한 파동을 일으킨 사건은 없었다. 당이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고당전쟁은 고수전쟁의 결과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고, 이 전쟁의 추이를 세계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침공 이후 백암성은 유일하게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구려의 성이었다. 당 태종의 허락 하에 당나라 군대가 그 성을 약탈한다고 하자. 앞으로 다른 고구려 성들의 결사 항쟁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싸움을 할 때마다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이미 요동성에서 너무나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이 소모됐다. 

백암성의 항복을 주동한 성주 손벌음은 연개소문 집권 후 교체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개소문의 은총을 받을 만큼의 비위는 잘 맞췄는지 몰라도 무능했다. 연개소문의 유혈 쿠데타 후 성민들과 교감이 없는 낙하산 성주들의 수가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당 태종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 태종은 황제로서의 덕화를 보여 고구려에 내재한 균열을 더욱 심화시켜야 했다. 성이 함락되고 포로가 된 병사 1400명과 성민 1만 명이 조사를 받았다. 백암성은 큰 화재가 없었기에 성민의 호적이 배신자 성주의 손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심문 과정에 백암성민이 아니었던 자들이 색출됐다. 

먼저 상관의 가족들을 모시고 있던 요동성의 성사(省事)가 적발됐다. 요동성이 함락될 때 대화재 속에서 빠져나와 백암성으로 왔다. 성이 함락된 후 다시 잡혀 모든 것이 밝혀졌다. 태종은 충을 다하는 성사의 의로움을 높이 샀다. 요동성에 수소문해 장사(長史)의 시신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화려한 상여에 모셔 그 가족과 부하인 성사와 함께 고향인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여비로 비단 다섯 필도 주었다. 성사와 장사 가족들의 생환은 백암성에서 일어났던 일을 평양에 선전하는 역할을 할 터였다. 

하지만 창으로 계필하력의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혔던 오골성의 기병대장 고돌발은 체포돼 포박을 받았다. 부하들과 함께 돌궐 기병을 깨고 백암성으로 들어왔으나, 이어진 성밖 기병전에서 동료들이 패배하면서 고립됐고 포로로 잡혔다. 그는 당사자 계필하력에게 인도됐고, 생살여탈권이 맡겨졌다.

계필하력은 자신을 패배시킨 자를 보자 분했다. 하지만 황제가 성민 모두를 모아놓고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분위기에서 그가 고돌발을 때려죽였다는 말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고돌발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군인이 아닌가. 마음을 고쳐 먹은 계필하력이 당 태종에게 상주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저들은 그 주인을 위해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찔렀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병사입니다. 그와 더불어 처음에는 서로 알지를 못했으니 원망하고 원수질 일은 아닙니다.”

6월 2일 백암성을 지원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온 고구려 지원 병력 모두가 방면됐다. 고돌발과 오골성에서 온 기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한 달 전 계모성으로 가려다 길이 막혀 백암성으로 들어간 가시성(加尸城) 병사 700명도 풀어줬다. 이동하는 가운데 먹을 양식도 백암성의 창고에서 꺼내 줬고, 무기 휴대도 허락됐다. 만일 그들이 가족이 있는 오골성과 가시성에 나타나게 된다면 그 존재 자체가 황제의 덕치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노리고 병력 15만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 병력은 흑수말갈(黑水靺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사냥을 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완전한 수렵민인 당 태종 휘하에 있는 돌궐기병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유목민인 돌궐인들은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흑수말갈인들은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야 했다. 언제나 가혹한 환경은 사람들을 최고의 전사로 만들었다. 가혹할수록 더 그러했다. 궁술이 떨어지는 자는 이미 다 굶어죽었는지 그들은 거의 모두 백발백중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그들을 어떻게 매수했는지는 몰라도 당 태종이 야수와 같은 그들과 싸워야 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고구려는 다양한 수단을 갖고 주변의 세력을 자기세력화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당제국이 고구려와 공존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였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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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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