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 네이버

백제/왕 2012. 11. 27. 18:25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085


삼국시대 3대 정복군주를 꼽는다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신라 진흥왕, 그리고 백제에서는 단연코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임금으로, 서기 346년에 즉위하여 375년까지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폭을 넓히고, 역사서 편찬, 수도의 확장, 왕권 강화, 해상 무역 등을 발전시키는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또한 백제 초기 불완전했던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한층 강화시켜 백제를 고대국가로 완성한 임금이라고 평가받는다. 근초고왕의 활약 탓에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근초고왕의 이름은 여구(餘句)다. 여는 왕의 성씨이며, 구가 이름이다. 그는 체격이 매우 뛰어나며, 원대한 식견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백제사를 대표하는 임금답게, 최근 텔레비전 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극에 등장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으로, 사실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부족하다. 일례로 그가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지조차 기록이 부족하다.
 
왕호인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의 경우는 5대 초고왕과 6대 구수왕에서 왕호를 따온 것이다. 이처럼 왕호가 닮은 것에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백제의 역사를 거슬로 올라가면,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두 사람이 있다. 백제 왕실은 1대부터 7대 사반왕까지는 온조왕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사반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쫓겨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다.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개루왕은 166년, 고이왕은 286년에 죽는다. 그가 무려 120살 이상 살았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하다. 고이왕의 성씨는 여씨가 아닌 우(優)씨였다. 백제 건국이야기에 등장하는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였다. 고이왕은 온조의 후손이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9대 책계왕과 10대 분서왕, 12대 계왕이 모두 고이왕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11대 임금인 비류왕(比流王)은 고이왕의 후손이 아니라, 온조계 인물이었다. 초기 백제는 온조와 비류 두 사람의 후손이 서로 왕위를 교대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계왕은 단지 임금이 된 후, 3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13대 임금이 된다. 근구수왕 이후 백제 왕위는 모두 그의 후손이 차지했다. 백제 왕실은 온조의 후손이 이때부터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류계 후손을 완전히 제압하고 단일한 왕통을 확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근초고왕은 진(眞)씨 귀족과 혼인을 맺고, 진씨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삼국사기] 등에는 그가 즉위한 후 20년간의 행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가 백제의 내실을 다지고 외부로 팽창할 준비를 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의 활약을 기다린 시대적 환경

한 인물의 행동과 사고는 시대적 환경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의 살았던 4세기 동아시아는 혼란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격변의 시대였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문화적 중심지였던 황하 유역의 북중국을 다스리던 진(晉)은 5호(胡)라 불린 갈, 저, 강, 흉노, 선비 등 여러 종족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316년 양자강 유역으로 쫓겨났다. 북중국은 여러 종족들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 수시로 나라가 세워졌다가 망하기를 거듭하였다. 남중국으로 쫓겨난 동진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중국의 나라들과 대립하며, 잦은 전쟁을 했다. 이러한 혼란은 중국 주변의 많은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는 세력 확장에 뛰어들어 313년과 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는 한편, 서방으로 진출을 서둘렀다. 
 
백제는 3세기 중엽부터 대방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대방군을 통해 중원지역의 문물을 수입하고 이를 주변국가에 나눠줌으로써 이득을 챙겼다. 대방군이 사라지자, 백제는 중원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양 활동에 나서야만 했다. 백제는 옛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 포섭했다. 이들이 가진 기술력을 적극 수용했다. 이는 곧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했다. 또한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직접 교역을 함에 있어서 보다 강한 국력이 필요해졌다. 변화하는 국제 환경은 백제로 하여금 보다 통합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요구에 걸맞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가야와 마한을 정복하다

그는 다져진 국력과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의 작은 소국들을 정벌해갔다. [일본서기]에는 366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비리 등 4읍의 항복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 백제는 마한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키고, 전남 해안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가야연맹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행사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태자와 함께 직접 전쟁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왜국 용병의 도움도 받았다. 백제는 가야에 속한 탁순국을 매개로 왜국과 만난 바 있었다. 근초고왕은 왜국의 사신을 궁성으로 초대하여,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 가지 진기한 것들 보여주며, 백제의 부강함을 과시했다. 백제는 비단, 쇠뿔로 만든 활, 철 등 왜국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앞선 기술력을 많이 갖고 있었다. 백제 장군 목라근자는 왜병을 지휘하여 신라군도 격파하고, 가야 지역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한다.
 
백제는 369년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는데, 그 실물이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된 바 있다. 74.9㎝의 칠지도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이 명문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한국학계는 보고 있다. 당시 왜국은 백제의 앞선 문물을 얻기 위해 백제에 용병을 제공해주는 나라였다. 백제는 왜왕에게 뛰어난 검을 줌으로써, 왜국의 협력을 구한 것이다. 일본학계는 백제가 왜국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명문 내용이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따르기 어려운 주장이다. 물론 당시 백제도 왜국에 직접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근초고왕이 왜의 용병을 활용한 이후, 백제와 왜국은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근초고왕은 가야 연맹에 속한 작은 소국들과 마한의 잔여 세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호령하는 절대적 강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경쟁자가 있었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근초고왕

근초고왕의 상대는 고구려 고국원왕이었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 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진격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큰 전략을 꾸미고, 근구수태자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시도하게 하여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인구나 국토 면적, 병력 규모 면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백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근초고왕의 탁월한 지휘능력, 첩자의 활약,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지휘하는 통일된 군 명령 체계를 가진 군대 때문이었다. 백제군은 모두 황색 깃발을 사용할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반면 고구려 군은 왕이 지휘하는 적색 깃발 부대를 제외하면 오합지졸이었다. 백제군은 먼저 고구려의 정예군인 적색 깃발 군을 집중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그러자 나머지 고구려군은 저절로 무너졌다.
 
전쟁에 패한 고구려가 371년 다시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군사를 숨겨두고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다. 매복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다시금 고구려 군을 격퇴시켰다.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마침내 정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맞혔다. 비록 고구려 평양성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백제는 고구려왕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 큰 수모를 안기며, 강성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라.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 – [송서(宋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梁書)]
 
두 개의 중국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 요서, 진평군은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지려면 강력한 해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시 요서 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백제가 영토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정확히 언제, 어떤 적들을 물리치며 영토를 확보했고, 언제 이곳을 빼앗겼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심지어 북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는 없고, 오직 남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만 이런 기록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백제가 이때 요서, 진평군을 지배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백제가 아닌 중국 측에서 기록한 것들을 굳이 잘못된 기록이라고 볼 이유로 충분하지가 않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다. 또한 직접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진출할 때의 상황 등을 봐도 거리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이때 백제가 요서 지역을 지배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요서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백제를 백제답게 만든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으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고, 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다. 고구려, 신라, 가야가 모두 두려워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던 점은 백제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으로 남았다. 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백제가 화려하고도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는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참고문헌 : 이도학, [백제인물사], 주류성, 2005;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2000; 엄기표, [백제왕의 죽음], 고래실, 2005; 강종훈, [백제 -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4], 고래실, 2005;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1992년;
 
발행일  2011.04.04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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